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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지로는 제 허리를 끌어안은 팔을 풀고 일어났다. 옆자리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기유는 깨어날 생각조차 않은 채 단잠에 빠져있었다. 탄지로는 사형의 감긴 눈 밑 기다란 속눈썹이 살랑이는 걸 보다 그가 깰까 조심스레 다리를 움직였다.

 

동이 튼 하늘을 배경삼아 도자기 잔 위에 종이주머니를 얹고 그 안에 검은 가루를 일정량 넣었다. 그리고 끓인 물을 부었다. 행여 물이 튈까 마음을 졸이며 천천히. 주머니 틈 사이로 물이 여과되어 내려지는 동안 탄지로는 신발 신고 대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문을 열었을 때 발밑으로 돌돌 말린 종이더미가 놓여있었다. 한 손으로 집어올리자 종이 냄새와 진한 잉크 냄새가 코 안으로 깊숙히 들어왔다.

 

기유는 신문을 보며 가배(咖啡, 커피의 옛 말) 마시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의 권유에 한 모금 마셔봤다가 잿물 비스무리하게 쓴 맛이 낯설어서 이후 입에 대지않는 탄지로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그 양탕국이 뭐가 맛있어서 매일 찾는 건지.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즐겨마시는 것이기에 탄지로는 서투른 솜씨로나마 매일 내려 주었다.

 

"기유씨, 일어나세요."

 

탄지로의 목소리와 함께 짙은 향이 기유를 일으켜세웠다. 평상시의 단정하고 품위있는 모습과는 정반대로 기유는 머리 풀고 잔뜩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잠에서 덜 깬 기유를 앉히고는 그의 앞에 신문과 잔을 대령했다.

 

"오늘 조간 신문이랑 가배에요."

"응, 고맙다."

 

기유는 한 손으로 신문을 들어 최근 세상 만사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간파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 커피잔을 집어 음미했다. 커피 마시는 사형의 자태는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정도의 고고함을 보이고 있었다.

 

탄지로는 가만히 기유의 뒤에 무릎꿇고 앉아 머리칼에 참빗을 갖다대었다. 사악, 사악. 머리 빗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타마요에게서 선물받은 동백기름을 살짝 바르니 달큰한 향기가 났다. 누군가가 제 몸에 손 대는 걸 싫어하는 기유는 탄지로가 자신의 머리를 손질하는 일만은 예외로 내버려두었다. 늘상 그래왔으니까. 하나의 일상처럼 당연해서.

 

"기유 씨 머리는 언제나 부드러워요."

"네가 손질한 덕분이다. 능숙하더구나."

"동생들 머리 빗어주곤 했거든요."

"그래서였군."

"오늘은 색다르게 묶어보실래요?"

"칸로지의 머리라면 사양한다."

"왜요. 귀여울 것 같은데. 아니면 시노부씨 머리는요? 네즈코가 쓰던 머리장식 있는데..."

"거절하지."

 

소박하게 머리 모양 가지고 사형과 사제가 투닥거리는 사이 맑게 개어있던 하늘이 점차 흐려지고 물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실같이 가느다란 물줄기가 무리를 이루어 쏟아져내렸다. 물비린내 맡은 탄지로가 비 내리는 정원을 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모처럼 지령 없는 날인데 비 와서 집에 꼼짝없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기유는 커피잔을 비우고 신문과 함께 내려놓고선 풀죽은 사제를 바라보았다. 쉬는 날에 함께 시내에 놀러가 동물원 구경하고 영화관에서 영화 한 편 보기를 얼마나 기대했던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간 기유는 이후 감빛 기모노 위에 하오리를 걸친 모습으로 나왔다. 평소의 대원복 차림과는 다른 정갈한 느낌이 났다.

 

"기유 씨?"

"외출 준비를 해라, 탄지로."

"어디로 가나요?"

 

알게 될 거다. 단호한 그의 대답에서 빨리 옷 갈아입으라는 압박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탄지로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대원복 외에 딱히 입을 게 없어 고민하던 찰나 며칠 전 기유가 사 준 외출복이 떠올랐다. 방 구석 장롱을 열었다. 안에서 청량한 느낌의 풀빛 기모노와 하카마가 기다렸다는 듯 고운 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사형의 호의에 감사하며 옷을 집고는 즉시 갈아입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르륵 하고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탄지로가 나왔다. 칙칙한 대원복 벗고 산뜻하게 차려입은 사제의 모습이 맘에 들었는지 기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잘 어울린다."

"감사합니다."

 

사제를 훑어보는 푸른 눈은 평상시의 냉기가 아닌 부드러운 온기를 담고 있었다. 탄지로는 알았다. 그것은 분명 연인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빛임을. 이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시키겠답시고 어서 출발하자며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가 정수리 위로 비를 맞았다. 그제야 정신차린 소년은 젖은 머리칼을 정돈할 생각도 없이 우산 가지러 도로 안으로 들어갔다.

 

****

 

빗속을 헤쳐 탄지로와 기유가 다다른 곳은 수주저택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수국꽃에 둘러싸인 아담한 서양풍 단독주택은 동화책 속 예쁜 집을 보는 듯했다. 

 

"기유씨, 여긴..."

"기둥들과 회식했던 곳이다. 정확히는 칸로지가 일방적으로 끌고 오긴 했다만..."

"네에? 그럼 여기가 식당이란 거에요?"

"일단 들어가서 식사하지."

 

탄지로의 손을 잡고 기유가 문 열고 들어갔다. 콧수염이 멋드러진 양장 차림의 노신사가 친절히 맞이하였다.

 

"어서오십시오. 몇 분이십니까?"

"둘."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탄지로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장 위의 유리 전등. 창가 틀에 달린 커튼.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구석에서 홀로 노래부르는 전축. 자신의 옛 집과 수주저택과는 다른 느낌의 건물 내부 모습이 신기했다. 메뉴판을 펼쳐 보면서 기유가 말했다.

 

"예전에 일본 주재대사 지냈던 구라파(유럽)인의 저택을 당시 담당 요리사가 사들여서 식당으로 개조했다 하더군."

"구라파요? 거긴 굉장히 먼 곳 아니에요?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이미 그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배 타고 바다 건너 이 곳에 정착해왔다. 나랏일이든, 사업이든, 혹은 개인적 사유든."

"그렇군요."

"여긴 오므라이스라는 요리로 유명한 곳이다. 한 번 먹어볼래?"

 

기유의 추천을 받아 탄지로는 오므라이스를 선택했다. 제 것까지 고르고 나서 기유는 웨이터를 불러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웨이터의 손을 통해 식전빵 담은 그릇이 테이블 위 중앙에 내려앉았다. 밥과는 다른 느낌의 곡물 맛이 입 안에 살살 녹았다. 애피타이저용으로 나온 수프는 진득한 크림 맛이 났다.

 

"주문하신 오므라이스와 커틀릿입니다."

 

탄지로 앞으로 노란빛의 계란 지단 얹은 요리가, 기유 앞으로 판판한 돼지고기 튀김 요리가 서빙되었다. 잘 먹겠습니다. 음식에 대한 감사를 표한 뒤 수저를 들었다. 계란 지단과 함께 볶음밥이 탄지로의 입 안으로 들어가 부드럽게 식도로 넘어갔다. 고슬고슬한 밥알과 버터 맛이 고소하게 와닿았다.

 

기유는 튀김옷 입은 돼지고기를 날렵하고 우아한 손짓으로 썰었다. 커틀릿 조각을 날카로운 포크 끝으로 찔러 씹어먹었다. 잘 익힌 고기와 튀김 맛이 하나가 되어 식도 안을 기름칠했다. 곁들린 양배추 샐러드는 아삭한 식감과 포만감을 더해주었다.

 

"탄지로, 음식은 입에 맞느냐?"

 

이에 탄지로는 양볼 가득 부풀려 우물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바라보던 기유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다행이군."

 

짧은 한 마디 말 안엔 탄지로를 향한 기유의 감정이 압축되어 있었다. 기유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탄지로는 알 수 있었다. 그에게서 나는 냄새가 포근하고 다정했으므로.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후식으로 커피가 나왔다. 커피를 달가워하지 않는 탄지로에게 기유가 각설탕 넣어보라며 조언하였다. 탄지로는 테이블 위 조그마한 도자기병 뚜껑을 들고 그 안의 하얀 각설탕을 집게로 꺼내 커피 안에 넣어보았다. 퐁당 빠지는 소리가 영롱했다. 티스푼으로 젓고 한 모금 마셔보니, 쓰디쓴 맛 뒤로 달디단 맛이 혀 위에 느껴졌다. 

 

두 사람이 오붓하게 티타임을 즐기는 동안 창 밖 너머 수국꽃 위로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툭툭 떨어지는 빗소리가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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