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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다녀오겠습니다.”

“오빠! 타비(足袋, 일본식 버선)는 어쩌고? 왜 맨발이야?”

“나 신입이라서….”

“지금 이렇게 추운데? 신고가서 백화점 들어가기 전에 벗어”

“고마워 네즈코. 동생들 잘 돌보고 있어. 맛있는 거 사 올게.”

“오빠, 잘 다녀와~”

 

  오늘은 드디어 탄지로가 정규 사원으로 출근하는 첫날이었다. 삼 개월간의 수습 기간을 마치고 사원으로 정식 계약 이후 첫 출근날이기에 항상 가는 익숙한 출근길이지만 집 앞까지 마중 나온 동생들을 뒤로한 채 조금은 가벼운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드디어 한 사람 분의 몫을 하겠구나. 약간 안도와 함께 빼곡히 고객의 정보가 적힌 기록지를 출근길 내내 제발 오늘 하루가 무사히 끝나기를 바라며 읽고 또 읽었다. 

 

  백화점의 직원 출입구로 들어서며 탄지로는 곧장 탈의실로 들어가 누가 볼세라 후다닥 타비를 벗었다. 백화점이라 이런 사소한 것에도 아주 철저하기 때문에 탄지로가 타비를 신고 왔다는 사실을 들키면 기껏 출근해놓고 곧장 퇴근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매장 내에서 입는 정직원에게만 제공하는 고급 하카마를 입고 앞치마를 두르자 제법 신입사원의 태가 났다. 거울을 향해 이리저리 몸을 돌려 옷매무새를 단장하던 탄지로는 카마도라고 적힌 명찰을 뿌듯하게 가슴께에 달았다.

 

“카마도 군, 여기야 여기!”

 

  탄지로의 바로 위 선배인 마코모가 탄지로를 부르자 화들짝 놀라 얼른 그쪽으로 뛰어갔다.

 

“뭘 그렇게 보고 있었어?”

“오늘 제 이름 적힌 명찰 처음 달아봐요.”

“그리고 보니 탄지로, 오늘 정규직 첫날이구나. 잘 부탁해.”

“네! 감사합니다!”

 

  탄지로는 우렁차게 대답하고 마코모와 함께 아침 조례가 한창인 메인 로비의 복도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아침 조례가 이미 시작한 터라 탄지로는 서둘러 제일 마지막 줄에 서서 겨우겨우 가쁜 숨을 골랐다. 정신 차리자 카마도 탄지로. 앞치마 주머니에 수첩과 펜을 꺼내 몇 가지 전달 사항을 받아적었다.

 

 

“자, 그럼 오늘 내점하실 귀빈은 토미오카 상사의 토미오카 님께서 내점하실 예정입니다. 매장마다 늘 구매하시는 구매 목록들 잘 확인하시고 친절하고 깍듯한 응대 잘 부탁드립니다.”

 

“토미오카 상사….”

 

  글이 빼곡히 적힌 수첩을 펼쳐서 가장 너덜거리는 페이지를 확인했다. 하필 첫날부터 토미오카 상사라니. 망연자실하며 이미 모든 문장을 다 외우고 있음에도 하나라도 잊어버릴까 봐 읽고 또 읽었다. 거의 모든 선임으로부터 귀가 닳도록 들은 토미오카 상사였다. 토미오카 가문은 그 이름만으로 이미 산속이나 다름없던 탄지로가 사는 동네까지 그 명성이 자자할 정도로 엄청난 명문가였다. 무역을 통해 수입해온 해외의 다양한 고급 수입품들로 일본 본토 시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장악하여 오랜 기간 무역품을 황실에 진상하는 그야말로 부와 명예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일본의 가장 유명한 명문가 중 하나였다. 소문에 따르면 토미오카 가문이 보유한 자산은 가히 황실을 뛰어넘어 열도를 살 정도의 막대한 재력을 가졌다는 꽤 그럴싸한 소문이 돌고 있기 때문에 황실가는 물론 일본의 유력 정·재계 가문들이 토미오카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려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기에 백화점 고객 중에서도 토미오카 가문은 가장 까다롭고도 중요한 귀빈이었다. 막 입사한 신입사원인 탄지로에게 고개를 들고 볼 수 없는 높은 존재이지만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 몰라 백화점의 전 직원들은 수습 기간에 귀에 딱지가 앉도록 외워야만 했기에 탄지로도 자다가 일어나서도 토미오카 가문의 중요한 정보들을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적으면서 외우는 편인 노력파 탄지로의 수첩에는 거의 흰색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토미오카 상사의 모든 것들이 적혀있었다. 항상 오시는 큰 어르신이 꼭 챙겨 먹는 음식부터 따님이 좋아하는 과일과 좋아하는 패턴의 원단, 촉감, 색상과 더불어 아드님이 좋아하는 음료. 하다못해 기르던 강아지의 역대 이름까지 적혀있었다. 모두가 심혈을 기울여 응대하는 엄청난 가문이지만 백화점의 매출을 좌우하는 가장 큰 거래처이기 때문에 탄지로는 호흡을 가다듬고 수첩에 집중했다.

 

 

 

*

 

“오늘은 토미오카 도련님께서 내점하십니다.”

 

  허겁지겁 뛰어온 귀빈 출입구 담당자의 말을 전해 듣고 백화점의 전 매장이 들썩였다. 탄지로는 손가락 끝에 닿는 하카마 자락을 꽉 쥐고 앞치마에 달린 주머니에 수첩을 넣었다. 제발 제발, 오늘 실수만 하지 않기를! 죽 늘어선 인사 행렬 끝에 자리 잡은 탄지로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이마가 거의 허벅지에 닿도록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토미오카 도련님, 환영합니다.”

 

  도쿄 내에 얼마 없는 고급 세단이었다. 탄지로가 출퇴근하면서 백화점으로 드나드는 많은 차를 봤지만 이렇게 크고 기품있는 차는 처음 봤다. 칠흑 같은 새까만 차체에서 내린 사내에게 모두가 고개를 바짝 숙여 인사했다. 탄지로는 자기도 모르게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라 얼른 이마를 허벅지에 붙였다. 저기서부터 몇 명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새까만 구두 끝이 탄지로의 눈에 스쳐 지나갔다. 코가 밝은 탄지로는 그 찰나에 펄럭이는 망토 자락에서 은은한 바다의 냄새를 느꼈다. 그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시원한 바다의 냄새라 생각했다.

 

“토미오카 도련님, 어서 오십시오. 큰 어르신은 같이 오시지 않으신 겁니까?”

 

  탄지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사내를 코로 뒤쫓았다.

 

“도련님….?”

 

  기유는 차에서 내려 아버지가 시킨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죽 늘어선 직원들의 환대가 전혀 반갑지 않았다. 그저 돈을 손에 쥐고 있는 자로만 자신을 바라보는 계산적인 눈이 싫었다. 빨리 상황을 피하고 싶어 성큼성큼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옆에서 조잘대는 점장의 말이 거슬리는 차에 더 거슬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하얀 입김이 나오는 겨울이었다. 기유는 발걸음을 멈춰 다시 뒤로 돌아가니 따르던 직원들 모두 안절부절한 얼굴로 기유를 쫓았다.

 

‘아, 역시. 신경 쓰여.’

 

  탄지로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꾹 참고 조리 사이로 툭 튀어나온 엄지발가락만 쳐다보았다. 얼른 고개를 들고 싶다 생각하자마자 가까운 곳에서 어딘가 다급한 소리가 났다. 두근두근 미친 듯이 뛰어오르는 심장 박동이 허벅지로 느껴졌다. 새카만 구두코가 탄지로의 앞에 멈추어 서자 탄지로는 마치 파도가 몰려드는 듯한 엄청난 바다 냄새에 온몸이 흠칫 떨렸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탄지로는 자신의 앞에 한참을 서 있는 기유의 그림자에 뭔가 잘못한 것이 있나 한참을 고민했다. 첫날인데 실수하면 안 되는데. 탄지로의 머릿속에 자기만 오매불망 기다리는 동생들의 동그란 눈동자가 떠올랐다. 제발 무사히 지나가기를. 제발 그냥 지나가 주세요 토미오카님.... 숨을 쉴 때마다 몰아치는 짙은 바다 냄새에 질식할 거 같아 몽롱한 정신을 꽉 붙잡고 있던 탄지로는 한시라도 빨리 이 상황이 끝났으면 했다. 눈을 꾹 감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자 한참을 멈춰 서있던 구두가 빠른 걸음으로 탄지로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바닷물에 온몸이 흠뻑 젖은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신경 쓰여.”

 

  탄지로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 뻔했다. 분명, 신경… 쓰인다고? 내가?  기유는 알 수 없는 한마디를 남기고서 그대로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갔다. 탄지로는 자신의 앞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까지 보고 그제야 허리를 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기유는 백화점 가장 고층의 고급스럽게 준비된 귀빈실에서 아버지께 부탁받은 모든 일을 일사천리로 해결했다. 경영권 승계를 위해 아버지의 일을 하나씩 물려받기 시작했고 영리한 머리로 아버지보다도 더 압도적인 속도로 모든 일을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했다. 기유의 주변 사람들도 기유의 일 처리 속도에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갈려 나가고 있지만 그만큼 토미오카 상사는 기유를 중심으로하여 더욱 탄탄하게 앞으로 향해 나아가는 중이었다.

 

 

 

*

 

“카마도, 카마도 군! 빨리!”

“네! 지금 갈게요!”

 

   탄지로는 그 뒤로 몇 층을 뛰어다니며 여기저기 불려 나갔다. 역시 백화점은 바쁘구나. 땀을 식힐 여유도 없이 금방 업무가 들이닥쳤다.

 

“얘, 카마도 군! 이쪽으로!”

“네!”

 

  탄지로는 손님이 찾는 상품을 정신없이 들고 다녔다. 저 멀리서 같은 시기에 입사하여 수습기간을 함께한 이노스케가 엄청난 속도로 물건을 나르는 모습을 보고 나도 지지 않고 열심히 일해야겠구나! 다시한번 다짐하며 발걸음을 빠르게 놀렸다.

 

“거기! 카마도 군! 미안한데 이거 들고 귀빈실로.”

“저 말씀이신가요?”

“지금 손이 비어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어. 고마워. 부탁할게.”

 

  귀금속 매장에 근무하는 후지코는 겉에 포장된 것만 보아도 정말 귀해 보이는 상품을 탄지로의 손에 쥐여주며 단단히 당부했다. 탄지로는 이미 다 아는 내용이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성실하게 대답한 뒤 가장 고층에 위치한 귀빈실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고급스러운 장식으로 깔끔하게 마감된 거대한 문 앞에서 목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간신히 몰아쉬며 탄지로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정신 차리자. 카마도 탄지로. 탄지로는 가볍게 문을 두드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실례하겠습니다. 주문하신 상품 전해드리겠습니다.”

 

  기유는 준비된 물건을 쭉 둘러보는 중에 다급히 다가온 소년을 쳐다봤다. 뭔가 착오가 생겨 미처 미리 준비 못 한 귀금속을 들고 온 듯싶었다. 다시 서류를 확인하려는데 이상하게 귀금속을 가져온 소년 낯이 익었다.

 

  ‘아, 아까 그 소년이었다.’

 

  입구에 인사하는 행렬 가장 끝에 어째서 이 계절에 맨발인지 아직도 의문이었던 문제의 그 소년이었다. 기유는 탄지로가 가져온 귀금속 대신 탄지로의 새빨개진 발가락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탄지로는 기유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괜히 발가락을 꼼지락거리자 점장은 상품을 전달받고 탄지로를 급히 뒤로 물렸다. 신입 하루 차인 탄지로가 감히 들어올 수도 없는 자리이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방에서 쫓아내야 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잠깐만. 지금 괜찮다면 타비를 좀 보여줄 수 있을까?”

 

  예상치 못한 기유의 부탁에 모두 잠깐 당황하긴 했지만, 의류 담당 사원은 금방 몇 가지 타비를 골라와 기유 앞에 늘여놓았다. 기유가 탄지로를 붙잡자 급하게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저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출 뿐 방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서 있었다. 담당은 타비를 하나하나 들어보이며 기유에게 설명했지만, 기유는 거의 몸을 반으로 접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탄지로와 타비를 번갈아 보더니 가볍게 손가락을 움직여 탄지로를 불렀다.

 

“거기, 소년. 이쪽으로.”

 

  점장이 옴짝달싹 못 하는 얼굴로 탄지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탄지로는 마지못해 고개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그쪽으로 향했다.

 

“이 중에서 어떤 타비가 제일 마음에 들지?”

 

  예상치 못한 기유의 질문에 탄지로는 잠깐 고심하더니 그중에서 가장 무난하고 아무 색도 무늬도 없는 심플하고 단아하게 생긴 제일 왼쪽의 타비를 골랐다. 

 

“보는 눈이 있구나. 이름이?”

“저, 저, 저는.... 카, 마도입니다.”

 

  한참을 뛰며 돌아다니고 소리친 탓에 잠긴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와서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조금의 실수가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자리었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기유는 그 자리에서 탄지로가 고른 제일 왼쪽의 타비를 들고 탄지로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카마도 군. 이것이 네가 고른 것이냐?”

“에, 예. 예. 토미오카 도련님. 맞습니다.”

 

  탄지로는 눈을 질끈 감고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순간 기유는 탄지로 앞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무릎을 꿇더니 안주머니에서 잔잔한 파도 무늬가 새겨진 손수건을 펼쳤다. 기유의 돌발 행동에 모두가 당황해 귀빈실 내의 분위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모두 그 자리에 멈춰선 채 숨죽여 기유를 지켜보고 있었다.

 

“잠깐, 실례하지.”

 

  탄지로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탄지로의 발에서 신을 벗겨 그 자그마한 발을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수건 위에 올려 두었다. 그 모습이 마치 값비싼 도자기를 어루만지는 것과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기품이 흘러넘쳤다. 고생이란 모르고 자랐을 상처 하나 없는 길고 곧은 손으로 자신의 작고 상처투성이의 투박한 발을 손수건으로 정성스럽게 닦아 내리자 탄지로는 그저 울고만 싶었다. 하필 직전까지 숨 가쁘게 바빴던 터라 이리저리 돌아다닌 탓에 땀 냄새가 날 텐데 기유는 전혀 그런 내색 없이 탄지로의 발을 정성스럽게 닦아주었다. 온몸이 긴장되어 경직된 채로 숨을 제대로 쉴 수조차 없는 탄지로는 터질 것 같이 새빨개진 얼굴로 몸을 가늘게 떨었다.

 

“긴장하지 말거라.”

“...... 네.... 토, 토미오카 도련님....”

 

  탄지로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지만, 더욱 몸이 떨려 이제 자기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기유는 기어이 무너지는 탄지로를 단단히 붙잡고 너른 가죽 소파 위에 앉히더니 본격적으로 탄지로의 발에 준비된 타비를 신겼다.

 

“반대쪽 발도.”

“.... 아, 네.......!”

 

  거의 졸도 직전의 탄지로는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붙잡으며 발 뒷꿈치에 힘을 줘 스스로 신을 벗었다. 손수건의 깨끗한 반대쪽으로 탄지로의 반대쪽 발도 닦은 기유는 잠깐 고개를 들어 탄지로를 올려다보았다.

 

“카마도 군은 발이 참 작구나.”

“.......”

 

  기유는 자신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거라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평소 청결함을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긴 기유는 처음 보는 소년의 발을 만지는 것을 상상도 못 할 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이 소년에게 뭐라 형용할 수조차 없는 운명의 끌림을 느꼈다. 기유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복잡한 감정이라 자신의 머리가 이상해져 버릴 것 같았다. 머리가 허벅지에 닿아 동그란 머리끝만 보이는 데도 무심코 멈추어 서버리게 되었다. 기유가 소년을 지나갈 때 묘하게 숯 냄새가 났다. 평소 이렇게까지 향에 예민하지 않았던 터라 오히려 그 순간이 기묘해 바쁘게 가던 걸음까지 뒤돌아갔다. 날이 몹시 추워 어서 건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소년은 조리 끝에 추위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발가락을 빼꼼 내밀고 있었다. 애처로운 모습에 자꾸만 눈이 갔다. 주변에서 재촉하는 것이 느껴져 곧 발걸음을 옮기고 말았지만 내내 그 소년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한시라도 빨리 아버지께서 넘겨주신 일을 해결하고 내려가고 싶었지만, 백화점 측의 실수로 가장 중요한 귀금속 실물을 아직 육안으로 확인하지 못한 터라 지루한 기다림이 이어졌다. 점장에게 소년에 대해 잔뜩 물어보고 싶었지만, 괜히 자신 때문에 소년이 난처해질까 입을 다물고 있던 찰나였다.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순간 기유의 귀에서 아주 희미한 종소리가 들렸다.

 

 

 

 

  기유의 누나인 츠타코는 십 년 동안 사귄 연인과 이별 이후 충동적으로 만난 남자와 단 삼 개월 만에 혼인을 약속했다. 그때 츠타코가 웃으며 기유에게 한 말이 아직도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있었다.

 

“기유야, 운명의 상대가 나타나면 진짜 귀에서 종소리가 나. 정말 이 사람이다 싶은 그런 사람 말이야.”

 

  무슨 이상한 헛소리를 하는 거냐며 퉁명스럽게 대답한 기유에게 혼인하던 날 얼굴을 붉히며 넌지시 말하던 츠타코의 얼굴이 곧장 떠올라 기분이 더욱 이상해졌다. 기유는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운명을 믿지 않았다.

 

“기유 너도 곧 그런 사람이 나타날 거야.”

 

  운명을 믿지 않던 토미오카 기유 인생에 두 번 다시 있을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난 순간이었다. 귓가에 종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이 사람이구나.

 

  기유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다시 봐도 역시 아까 그 소년이다. 반가운 내색을 하고 싶었지만, 일면식도 없는 터라 기유는 어떻게든 소년을 이 방에 잡아두고 싶었다.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겨울에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조금이라도 쉬게 해주고 싶었다.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어떻게든 붙잡아 둘 기회를 만들고 싶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소년의 젖은 맨발이 기유의 눈에 띄었다. 머리보다 손이 먼저 움직인 것은 기유도 처음이었다. 방안의 모두가 기유의 행동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본인의 고집으로 온몸을 덜덜 떨고 있는 소년의 애처로운 모습에 마음이 아팠지만 벌겋게 달아오른 발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이 핑계로 소년을 붙잡고 말았다.

 

  카마도. 소년의 성은 카마도였다. 소년의 이름도 궁금했지만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 두 발을 정성스레 닦고 타비를 신겨주는 것만으로 이미 적정 선을 넘었다 생각했다. 본인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이후 카마도가 어떻게 될 건지의 문제는 나중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그저 소년을 위해 뭐든 해주고 싶었다.

 

 

 

“발이 추워 보이길래 신겨주었다. 앞으로 꼭 챙겨 신도록 해. 올 때마다 확인하겠다.”

 

  탄지로에게 타비를 신기고 신까지 모두 신겨준 기유는 그제야 꿇은 무릎을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 방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정갈한 손길로 더러워진 손수건을 두 번 접었다. 탄지로는 그 모습에 정신이 탁 들어 소파에서 튕겨 나갈 듯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더니 이마를 바닥에 쿵 소리가 나도록 엎어져 감사 표시를 했다.

 

“저.... 토미오카 도련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탄지로의 인사에 당황한 기유는 얼른 몸을 숙여 탄지로를 일으켜 세웠다.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정작 본인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근데 어째서. 멈춰버린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명석한 기유의 두뇌가 잠깐 고장 난 사이 탄지로는 기유의 손에서 자신의 발을 닦은 손수건을 빼앗듯 잡아 빼 자신의 옷자락에 쑤셔 넣었다.

 

“토미오카 도련님의 손수건 제가 잘 세탁해서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타비 값도 제가 지불하겠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도련님!”

 

  숨도 쉬지 않고 말하는 탄지로를 향해 기유는 난처한 얼굴로 손을 저었다. 

 

“타비는 선물로 주고싶구나. 내가 개인적으로 지불하지.”

“하지만.......”

“그럴 순 없습니다. 잘못된 규정을 만든 저의 불찰이 오니 제가 부담하게 해주십시오.”

 

  탄지로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점장이 먼저 고개를 숙여 말했으나 기유가 완강하게 거부하자 어쩔 수 없이 기유의 말에 따르겠다며 물러났다. 탄지로는 옆에서 그저 안절부절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런 탄지로를 더는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기유는 서둘러 탄지로가 가져온 귀금속을 들여다보고 빠르게 상태를 확인한 뒤 서류에 서명 하자 아버지가 지시한 것들을 모두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오늘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도록 하지.”

 

  기유의 말에 다들 일사불란하게 몸을 움직여 기유의 채비를 시작했다. 분주한 귀빈실 안, 탄지로는 어쩔 줄 몰라 그저 고개만 숙일 뿐 아무것도 손댈 수 있는 게 없었다. 기유의 너른 어깨 위로 망토가 얹혀지자 백화점 직원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귀빈실을 나서며 탄지로의 타비 값을 사비로 지불했다. 어느 정도 걸어갔을 때쯤 탄지로가 가져간 손수건이 문득 떠올라 그 자리에 멈춰서자 모두 일제히 행동을 멈추고 기유의 뒤에 나란히 섰다.

 

“손수건을 꼭 돌려받고 싶은데.......”

 

  기유가 흘러가듯 말하자 점장은 손수건을 탄지로에게 건네받아 댁으로 직접 가져다주겠다며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기유는 곧장 발걸음을 돌려 다시 귀빈실로 향했다. 탄지로는 다리가 풀려 바닥에 풀썩 앉아있다 다시 돌아온 기유를 보고 너무 놀라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 카마도 군.”

“네, 네, 네! 토미오카 도련님!”

 

  탄지로는 급하게 정좌로 앉아 기유 앞에 예를 갖췄다. 그러자 기유도 탄지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탄지로를 바라보았다. 이상함을 느낀 탄지로가 고개를 살짝 들자 너무나 가까운 곳에 기유가 있었다. 작은 숨소리 하나까지 전부 느껴지는 것 같아 온몸에 열이 피어올랐다.

 

“그 손수건은 내게 소중한 것이다. 다음에 차를 보낼 테니 직접 내게 가져다줄 수 있겠나?”

“....... 네, 당연히. 기쁜 마음으로 제가 가져다드리겠습니다.”

 

  탄지로는 갑작스러운 기유의 부탁에 너무 놀라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이며 그렇게 하겠노라 말했다. 조금만 몸을 움직이면 닿을 거리에서 바라보는 기유는 누가 봐도 숨이 막힐 정도의 잘생긴 미인의 외모라 탄지로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부탁하마.”

 

  기유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귀빈실을 나섰다. 저 멀리 사라지는 기유의 옷자락에서 행복한 바다의 냄새를 맡은 탄지로는 그제야 허리를 숙여 새빨간 얼굴을 다리 사이에 가려도 이미 귀와 목덜미 끝까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기유는 문을 나서며 마음 속으로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할 수 있으면 거리로 뛰쳐나가 소리를 지를 정도로 기뻤다. 그리고 가장 기쁜 것은 역시,

 

 

카마도 군과 다시 한번 만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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