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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하신 해피밀 세트와 빅맥 세트, 드리겠습니다―.”

 

열시 반부터 두시까지의 로비는 일주일 내내 정신이 없다. 이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세 달이 지나 겨우 교육생 명찰을 떼게 되었지만, 런치 시간대의 카운터는 아직도 기합이 필요하다. 번화가가 아니라서 평소에는 손님이 많지 않은 이 매장도 점심때만은 주문이 밀려들어온다.

 

점심시간에 주문을 받는 것은 응대가 상냥하기로 정평이 난 매니저 시노부 씨. 시노부 씨와 함께 근무할 때면 나는 주로 러너를 맡는다. 시노부 씨가 받은 주문을 확인하고, 감자튀김을 튀겨놓거나 주방에서 만든 햄버거를 서빙하는 역할이다. 테이크아웃 주문의 포장도 내 몫이다.

 

“카마도 군, 슬슬 쉬는 게 어떤가요? 런치타임, 수고했어요.”

“아, 시노부 씨. 시노부 씨야말로 수고하셨습니다!”

“후후, 카마도 군은 목소리가 커서 정말 도움이 되네요.”

“네! 언제든 맡겨주세요.”

 

자아, 그럼 일단은 쉬자구요. 쉬고 나서 또 카마도 군의 목소리에 열심히 의지할 테니.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는 시노부 씨는, 정말이지 자타공인의 미인이면서 응대하는 방식이 뛰어나다. 그런 시노부 씨의 방식을 꼭 열심히 본받고 싶다.

 

 

한 시간 정도 휴식시간을 갖고 나면 많이 한산해진 매장과 마주하게 된다. 이때부터는 내가 단독으로 주문을 받고 카운터를 본다. 손님도 얼마 없기 때문에, 우선 시노부 씨는 쉬거나, 다른 일을 한다. 그릴을 담당하는 다른 크루도 교체되고, 추가 근무자가 올 때도 있다.

 

런치 때의 시끌벅적한 매장도 활기가 넘쳐서 즐겁지만, 이렇게 한산할 때에도 나름의 일이 있다.

 

자아, 우선은 커피머신 청소다. 이 매장은 상당히 조그맣기 때문에 카페 전용 카운터는 없다. 커피부터 아이스크림까지 전부 다 한곳에서 주문을 받아 처리한다. 커피머신을 세척하고, 탄산음료 기계, 아이스크림 기계를 순서대로 청소하는 게 내 나름의 루트다.

 

내가 이중에 커피머신을 가장 먼저 청소하는 이유는 딱 하나.

 

“앗! 안녕하세요, 기유 씨.”

“안녕. 탄지로.”

 

이 시간마다 찾아와 커피를 주문하는 손님, 기유 씨가 있어서다.

 

“오늘은 날씨가 좋네요!”

“응. ……좋은 날씨.”

“주문, 하시겠어요?”“따뜻한 커피. 그리고 오늘은, 다른 걸 추천해줄 수 있을까.”

“추천인가요. 그렇다면, 따뜻한 애플파이는 어떨까요? 조금 뜨겁지만, 달콤해서 커피에 잘 어울릴 거예요.”

 

이런 곳에 와서 가끔 메뉴 추천을 부탁하는 손님도 아직까지는 기유 씨 뿐. 커피머신을 청소하며 오늘은 기유 씨에게 어떤 디저트 메뉴를 추천할지 생각하는 것도 내 일과 중 하나다.

 

“…그런가. 그럼, 그걸로 부탁한다.”

“네에. 프리미엄 로스트 커피, 핫 애플파이 하나 주문 받았습니다. 드시고 가시나요?”

“아아.”

 

오늘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정색 옷을 입은 기유 씨는, 그린 것 같은 미남이다. 길을 걸으면 누구나가 돌아볼 것 같은 흔치 않은 미남. 시노부 씨도 자타공인의 미인이지만, 기유 씨는 좀 다르다고 해야 하나. 나이는 젊은 것 같은데도 뭔가 연록이라고 할까, 어쨌든 특이한 분위기가 있다.

 

주문을 끝낸 기유 씨는 언제나 앉는, 지정석에 자리를 잡는다. 나는 방금 세척한 커피머신에서 기유 씨를 위한 커피를 내린다.

 

이 꽃미남 손님의 이름은 토미오카 기유.

우리 매장에서 파는 150엔짜리 커피도 저 손님이 마시면, 긴자나 롯폰기의 고급 카페에서 파는 잔당 몇 천 엔을 상회하는 핸드드립처럼 보이는, 그림처럼 잘생긴 미남.

단골, 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멋쩍지만, 아무튼 이 매장의 단골인 남자다.

 

 

 

 

 

◇◇◇

 

 

기유 씨를 처음 만난 건, 아니, 정확히 기유 씨의 주문을 처음 받은 건, 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딱 이 주째였던 날이다. 이 주째라고는 해도, 출근일로는 네 번째쯤 되는 날이었다.

 

당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평범했다. 생활비 조달의 문제였다. 대학 진학 시 특대생이었기 때문에 학비는 해결되었지만, 본가에서 나와 살며 들어가는 생활비만큼은 따로 조달해야만 했던 것이다.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찾던 중 최종적으로 눈에 들어온 건 패스트푸드점의 아르바이트였다. 마침 살고 있는 집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좌석 수가 적은 매장도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가업인 빵집의 일을 계속 돕고 있었기 때문에 패스트푸드점도 쉽게 적응할 거라고 생각한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아르바이트, 생각보다 난이도가 높았다! 패스트푸드점을 평소에 거의 이용하지 않는 나로서는 터무니없이 어렵게 느껴질 정도였다.

 

준비해야 하는 메뉴도 너무 많았고, 손님 한 명의 주문을 받고 서빙하는 과정에는 생각보다 더 많은 단계가 필요했다. 일도 손에 익지 않았는데 손님들은 줄을 지어 들어왔다. 이 매장, 이렇게 손님이 많았나? 속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업무에 능숙한 매니저님이, 그러니까 시노부 씨가 나와 같은 시프트에 배정되어 일을 가르쳐주셨지만 지금 생각해도 초반의 두 달 동안 나의 일처리는 조금 끔찍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손님!!”

 

이 주 만에 결국, 나는 사고를 냈다.

손님의 옷에 아이스커피를 엎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런 건 중학교 때에도 한 적이 없는 실수인데. 한심하고 부끄러워서 숨고 싶다는 생각도 잠시였다. 무엇보다 나 때문에 괜히 커피를 뒤집어쓰게 된 손님과, 피해를 본 시노부 씨나, 다른 크루 분들에게 사과하고 수습하지 않으면. 나는 그 생각으로 최대한 몸을 숙였다.

 

“손님, 저희 교육생이 큰 불편을 끼치게 되어 죄송합니다.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시, 시노부 씨.”

 

옆에서 주문을 받던 시노부 씨가 내 쪽으로 즉시 다가왔다. 한심하다. 나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손님은 크게 불쾌한 냄새를 풍기지는 않았다. 잘생긴 얼굴이 조금 찌푸려진 정도였다.

 

“……부상은, 없다.”

 

엎지른 커피가 뜨거운 음료가 아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옷으로 시선을 돌리자, 검은 옷이라 잘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가슴팍부터 허리까지가 드문드문 액체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손님. 지금 즉시 닦아드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역시 시노부 씨다. 이런 상황의 응대도 깔끔했다. 내 실수로 벌어진 일만 아니라면 그렇게 감탄했겠지. 하지만.

 

“카마도 군,” 시노부 씨가 나지막이 지시한다. “우선 드레스타올로 처치해 드리고, 나머지는 제게 맡겨주세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깨끗한 드레스타올을 찾아 우선 카운터에서 나왔다. 다행히 1층 로비의 좌석이 비어 있었다. 나는 거기서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한 번 정말 죄송합니다, 손님!”

“괜찮다.”

“저, 세탁은 제가 어떻게든 변상을…!”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가볍게 쥐는 게 느껴졌다. 옷을 뚫고 느껴지는 차가운 손길에 흠칫 놀라면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제대로 마주 본 손님의 얼굴은 어쩐지 기묘하게 낯이 익다. 이렇게 잘생긴 얼굴,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가 없을 텐데도. 얼굴 표정만으로는 잘 알 수 없었지만, 남자에게선 희미하게 곤란한 냄새가 났다.

 

“괜찮다고, 말하잖아. 진정해. …탄지로.”

 

어라. 방금, 내 이름을……

갑작스레 들린 내 이름에 되물을 새도 없이, 남자가 미간을 좁히며 내 가슴팍을 가리켰다.

시선을 내리자 내가 입은 흰 유니폼에도, 명찰까지 갈색 얼룩이 형편없이 튀어 있었다. 아, 이 명찰인가. 내 이름을 안 건.

 

“네 옷에도 묻었어. 그것부터 닦아라.”

“가, 감사합니다!”

 

저, 손님의 옷이 우선 아닌가요? 물음표를 띄우면서도 다시 물을 자신은 없었다. 나는 드레스타올로 내 유니폼을 대충 문질러 닦고, 곧바로 손님에게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옷에 묻은 커피를 훔쳐내기 시작했다.

 

 

―라는 것이, 기유 씨와 나의 첫 대면이다.

 

나중에 아르바이트 중 친해진 젠이츠에게 이런 실수를 했다고 이야기를 하자, 젠이츠는 너그러운 손님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했다. 자신도 신입일 때 꽤나 실수를 했었는데, 불같이 화를 내는 손님이 개중 꼭 끼어 있었다고.

 

“세탁비도 받지 않고 가버린 손님이라니 운이 좋았어. 그야, 세탁비를 드리게 되면 최소 두 시간 분의 급료가 날아가는 거니까―.”

 

그 손님이 내 이름을 부르면서 날 다독여줬다고 하자, 그것만은 젠이츠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손님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며. 설마 여자?! 상냥한 누님??! 하고 흥분하기 시작해서, 아냐! 남자야! 무슨 타입이냐면 분명 쿨한 계열의 미남! 하며 손을 내젓자, 젠이츠는 곧바로 눈빛이 냉정해지며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런데, 그 손님의 이름까지 들어버리고, 통성명도 했다고 하면 더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데, 우리 매장에 그렇게 잘생긴 손님이 온 적이 있었던가?”

“무슨 소리야, 젠이츠?”

“아니 그야, 탄지로가 굉장한 미남이라고 하니까. 괜히 궁금하기도 하고. 그렇게 잘생긴 남자라면 곧 소문이 나는걸, 크루들 사이에서도.”“음, 그러고 보니…….”

 

기유 씨는 항상 내가 주문을 받고 있을 때에만 왔다. 더 정확히는, 나 혼자 로비를 볼 때만. 처음 왔던 날, 그러니까 내가 예의 그 실수를 해버린 날에는 런치타임이라 시노부 씨가 주문을 받았지만. 그 다음부터는 굉장히 사람이 없는 시간대에만 방문한다. 하지만 나라고 매일 근무하는 건 아니니까, 내가 없는 날에 오면 틀림없이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텐데.

 

“아! 젠이츠, 오늘 출근할 때 보지 못했어? 1층 로비의 왼쪽 좌석에 앉아있던 검은 머리 남자. 그 사람이 기유 씨야.”

“검은 머리 남자? 으음~. 인상이 좀 희미한데. 그런 손님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응. 아까 나에게 인사하고 갈 때도 옆에 있었잖아. 검은 옷을 입고 있었던 사람. 얼굴이 하얗고, 머리는 까맣고.”

“뭐야 탄지로, 나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는 걸. 게다가 그 묘사, 설마 귀신……? 무서워―!!!”

“젠이츠, 사람에게 귀신이라니. 실례잖아!”“탄지로오오오오오…….”

 

기유 씨의 인상이 희미하다…는 게, 가능한가? 150엔짜리 커피를 마시는 것조차 그림이 되는 남자인데.

 

하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 나는 간단히 생각하기로 했다. 젠이츠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고. 기유 씨는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도, 지나치게 소란해서 주의를 끌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나도 모든 손님을 기억하지는 못하니까.

 

같이 근무하는 사람들이, 전부 기유 씨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데다가, 그의 존재조차도 잘 모른다는 것을 내가 알게 되는 것은 꽤 나중의 일이다.

 

 

 

 

 

 

◇◇◇

 

이 아르바이트에 어느 정도 적응해 교육생 명찰을 떼자 얼마 후 2월이 되었고, 내가 재학 중인 대학은 춘계 휴업 기간에 돌입했다.

 

이 기간을 놓칠 수 없는 나는 시급이 더 높은 야간을 중점으로 시프트를 늘렸다. 야간이라고는 해도, 이 매장은 밤 열두시 삼십분에는 폐점한다. 지금까지 줄곧 해왔던 런치타임에서 빠지고 오후 늦게부터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야간에는 청소 업무가 주가 되는 편인데, 원래 청소하는 게 취미다보니 이쪽이 좀 더 즐거울 정도다.

 

“카마도 군, 오늘은 저도 밤 시프트니까. 폐점 시간까지 잘 부탁해요.”

“네, 시노부 씨!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래저래 신세를 많이 진 시노부 씨는 야간근무를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처럼 같이 폐점까지 일하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오늘의 야간 근무자는 시노부 씨, 나, 그리고 젠이츠다. 뒤쪽에서 시노부 씨가 젠이츠에게 인사하는 소리와, 신난 젠이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주문하신 빅맥 세트 드리겠습니다―.”

 

오늘도 기유 씨는, 어김없이 예의 그 지정석에 앉아있다.

 

“여기 있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아아, 하고 들릴 듯 말 듯 조그맣게 대답한 기유 씨는 트레이를 가지고 자리로 간다.

 

 

낮 시간에 주로 오던 손님인 기유 씨가 밤에도 오게 된 건 얼마 전의 일이다.

 

시프트가 밤으로 바뀌기 전의 마지막 날. 그 날도 어김없이 기유 씨는 런치 타임이 지나 방문해서, 언제나처럼 커피를 주문했다. 첫날 내가 실수한 이후로 대화가 길게 이어진 적은 없지만 기유 씨의 방문을 살짝 기대하고는 있었는데. 내일부터는 얼굴을 보기가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부터는 근무 시간대가 변동된다고 굳이 말하는 것도 조금 망설여졌다. 내가 없다고 기유 씨가 커피를 못 마시게 된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메뉴의 추천도, 누가 카운터에 있어도 친절하게 골라 줄 것이다.

 

그랬는데,

「어라, 기유 씨! 좋은 저녁입니다」라는 인사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시프트를 바꾸고 두 번째 근무일.

이제는 익숙해진 검은 옷을 입은 미남이, 그 옷만큼이나 새까만 밤에 방문했다.

 

기유 씨는 오지 않는 날도 있지만, 대부분은 전처럼 일정한 시간대에 온다. 그리고 가끔 내게 메뉴의 추천을 부탁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제는 커피와 디저트가 아니라 햄버거 세트를 주문한다는 점이다.

 

얼마 전에는 조금 기억에 남는 일도 있었다. 기유 씨가 처음 야간에 방문한 날, 마침 기간한정인 메뉴를 추천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꽤 기유 씨 마음에 들었는지, 기유 씨는 매번 그 메뉴만 주문하곤 했다. 하지만 기간한정은 기간한정. 며칠 전 판매 기간이 종료되어 버려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날 기유 씨에게 판매 종료를 알려야만 했다.

 

그 세트는 판매가 종료되었다고 했을 때 기유 씨의 표정이란. 드물게 조금 실망하고, 옅게 낙담한 냄새도 났는데, 뭔가 기유 씨에게서 의외의 면을 봐버려서.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자아, 또 청소다. 이 시간부터 아이스크림은 주문을 받지 않는다. 아이스크림 기계를 완전히 세척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새로운 드레스타올을 또 꺼내 들었다.

 

아이스크림 기계 세척이 끝나면 로비 청소다. 트레이와 플라스틱 컵을 정리하고, 쓰레기통을 교체하고……. 이 때는 내가 완전히 카운터를 비워야만 하기 때문에, 백룸에 있는 크루들이 주문도 같이 받는다.

 

“탄지로오! 이쪽 워싱 다 끝났으니까, 카운터는 내가 볼게.”

“응. 고마워, 젠이츠.”

“헤헤, 뭘. 아, 저희가 치우겠습니다 손님!”

 

고개를 돌리자 기유 씨가 다 먹은 트레이를 정리하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부터 내가 정리해야 하니까 그냥 내가 받아서 정리해버리는 쪽이 훨씬 편하다. 나는 얼른 뛰어가 기유 씨에게서 트레이를 받아 들었다. 아니, 받아 들려고 했는데, 기유 씨가 트레이 한 쪽을 잡고 놔주지 않는다.

 

“내가 하면 된다.”

“제가 할게요. 여기도 청소해야 하고, 또 제 일이니까.”

“…그런가.”

 

희미하게 불만스러운 냄새를 풍기던 기유 씨가, 이내 트레이를 완전히 내게 건네주었다. 그러더니,

 

“일은 조금 남았겠지만. 힘내라.”

 

하며, 내가 쓰고 있는 유니폼 모자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눌렀다. 어, 어라? 그러고선 뭐라고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바로 매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지금, 머리를 쓰다듬어 준 건가. 나, 장남인데! 이런 건 중학교 이후로 처음이다.

 

“타안지로오―? 조금 전의 손님에게, 나쁜 말이라도 들었어?”“어? 아니! 아냐! 응!”

 

청소, 청소! 일 해야지! 나는 트레이 위의 내용물을 쓰레기봉투에 급하게 쑤셔 넣었다.

 

 

 

 

“손님, 죄송하지만 매장 내에서는 음주가 금지되어 있습니다.”

 

큰일이다.

 

시프트를 밤으로 옮긴다고 했을 때, 어머니나 네즈코가 가장 먼저 물어본 게 있었다. 취객 때문에 위험하진 않냐는 거였다. 실제로도, 우리 빵집은 꽤나 일찍 문을 닫기 때문에 그런 일이 없었지만, 상가의 다른 가게들은 취객 때문에 소동이 벌어진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런 어머니와 네즈코에게 여기는 술집도 아니고 열두시 반이면 폐점이라고 안심시켰었는데.

 

“시노부 씨……!”

 

내가 2층 로비 청소를 하러 올라간 사이, 술에 취한 손님이 온 모양이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서 급하게 1층으로 내려오자 백룸에 있던 시노부 씨까지 카운터에 나와서 손님을 응대하고 있었다.

 

손님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언동도 그렇고 꽤나 고약하게 술에 취해 있었다. 내가 아무리 코가 좋다고는 해도, 술 냄새가 여기까지 날 정도였다. 취객이 가끔 방문할 때도 있고 위급상황의 대처 교육은 받았지만 실제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어떡하지? 나는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서 우선 카운터 앞으로 갔다. 젠이츠는 사정없이 떨고 있었지만, 시노부 씨는 침착했다. 손님이 가져온 건가? 카운터 근처의 취식 테이블 위에는 맥주 캔 두어 개와 술병이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었다.

 

“이런 거 시킨 적 없는데, 내 주문 제대로 내놓으라고! 임마!”

“이러시면 경비 부르겠습니다.”

“불러, 불러보라고! 바보 취급하는 거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 그치만 손님, 아까 이걸 주문하셨잖아요…….”

 

전부는 아니어도, 나는 대강 상황을 파악했다. 픽업 대에는 콜라 한 잔과 후렌치후라이 다섯 개가 올라와 있었다. 시노부 씨가 살짝 몸을 숙이는 게 보인다. 경비 호출 벨을 누른 것이다. 그렇다면 좀 안심이다.

 

그렇게 안심한 것도 잠시,

 

“이게 지금 사람을 무시하는 거냐!!!”

 

쾅! 시노부 씨가 잠시 눈을 뗀 사이, 탄산음료가 날아가 커피 머신에 부딪혔다.

 

취객이 컵을 집어던진 것이다. 너무 갑자기라 내가 막을 수도 없었다. 콜라는 엉망진창으로 튀어 바로 옆에 있던 젠이츠나 시노부 씨, 그리고 카운터 앞에 있던 나는 콜라에 상체와 머리가 젖었다. 저 사람이 조금만 덜 취했더라면, 우리 중 누군가는 꼼짝없이 플라스틱 컵에 어깨나 머리를 맞았을 테다.

 

“흐, 어, 히끅,”

“괜찮나요?! 아가츠마 군?”

 

경비는 대체 언제 오는 거지!? 나는 매장 입구를 힐끔거리며, 그나마 가장 가까이 있는 내가 그 사람의 팔이라도 잡을 생각으로 손을 뻗었다.

 

잠깐만. 저거.

 

흥분한 취객이 마구 휘두르는 팔에 맞아서, 취식 테이블의 맥주캔과 술병이 바닥에 떨어져, 구르고 산산조각으로 깨지는 소리가 났다. 요란한 소리에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은 것도 잠시, 나는 취객의 번들거리는 눈과 마주쳤다. 그 순간 굉장히 위험한 냄새가 났다.

 

이 사람, 휘두를 거다. 이 깨진 병을.

 

히이이이익! 젠이츠가 숨을 헐떡대는 소리가 났다. 나는 나도 모르게, 젠이츠와 취객 사이로 내 몸을 구겨 넣고, 눈을 질끈 감았다.

 

“커어어어어억!!”

“타안지로오오오오오―!!!”

 

나는 눈을 떴다. 젠이츠가 새파래진 얼굴로 나를 붙들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는,

 

아까 매장에서 나갔던 기유 씨가, 어느새 들어와서 그 취객을 잡아 누르고 있었다.

 

 

 

 

기유 씨가 취객을 제압한 덕에 위험할 뻔 했던 상황은 금방 진압되었다. 소동을 감지한 듯 바로 경비도 왔고, 그쪽에서 경찰까지 부른다고 했다. 건장한 남성들에게 둘러싸이자 취객도 더 이상의 소란은 일으키지 않았다.

 

시노부 씨는 재빠르게 타올을 꺼내 나와 젠이츠에게 하나씩 안겨주고 우리들의 상태를 살폈다. 시노부 씨도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었지만, 나를 걱정 어린 꾸지람을 피할 수가 없었다. 나는 기유 씨에게 어깨를 붙들린 채로 타올로 콜라가 튄 팔꿈치를 거칠게 닦아냈다.

 

“카마도 군, 당신 그렇게 위험한 짓을...!! 괜찮나요? 스태프룸이든 어디에서 좀 진정하고 있어요. 저는 경비와 이야기하고 올 테니.”

“―탄지로는 내가 데려가겠다.”

“기, 기유 씨.”

 

기유 씨가 내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나는 거의 기유 씨에게 끌어 안겼다. 시노부 씨가 기유 씨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인다.

 

“조금 전에는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당신은, 카마도 군의 지인인가요? 그럼 카마도 군을 부탁합니다. 카마도 군, 이대로 퇴근해도 좋아요. 아가츠마 군은 잠시 저와 함께.”

 

시노부 씨는 젠이츠와 나를 함께 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드물게 일방적인 태도로 스태프룸에 나와 기유 씨를 밀어 넣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기유 씨는 그대로 스태프룸 구석에 있는 다 꺼진 쇼파에 나를 억지로 앉혔다.

 

“저 괜, 괜찮…….”

“탄지로.”

 

괜찮다, 감사하다고 말해야 하는데, 말이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조금 떨리는 내 몸을 한 번 내려다보고, 기유 씨를 올려다보았다. 기유 씨에게서는 엄청나게 화가 난 냄새가 났다. 기유 씨의, 어른 남성의 손이 내 어깨를 세게 붙든다.

 

“왜 피하지 않은 거냐!! 너는, 그 남자가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어. 아니, 그 남자가 아가츠마를 해칠 거라고 생각해서 뛰어들었다. 왜 그런 짓을 한 거냐? 내가 없었으면 너는 크게 다쳤을 수도 있었어!!”

“기, 기유 씨…….”

“너는 어째서!!!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데, 일륜도도, 호흡도!! 어째서 이렇게 무모해!!”

 

일륜도? 호흡? 알 수 없는 단어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건 오로지, 기유 씨가 나를 대단히 걱정하고, 그렇기 때문에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 뿐이다. 이 남자가 나를 생각하는 감정만이 제대로 전해져온다.

 

나는 기유 씨에게 고개를 숙였다. 어쨌거나 기유 씨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 병에 맞았거나, 그 사람이 휘둘렀을 수도 있는 유리조각에 찔렸다면? 그 다음은 나도 모른다. 깊게 생각하지 않은 행동인 것은 맞았다. 기유 씨가 취객을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그런 일이 생겼을 수도 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기유 씨. 폐를 끼쳐버렸습니다. 이런 일에 휘말린 건 처음이지만 교육은 제대로 받았고, 그래서 나름대로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무엇보다도 젠이츠가…….”

“탄지로. 나는 그런 말을 들으려고 한 게 아냐. ……화를 내버린 건 미안하다.”

 

기유 씨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나와 눈을 마주쳐왔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군청색이 보인다.

 

“다시는 그러지 마라. 너 자신만을 지켜.”

“…….”

“약속해라, 탄지로.”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건 약속할 수 없다. 아마 같은 상황이 생긴다면 나는 오늘과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같이 있는 사람이 누가 됐든, 그 사람을 감싸고 뛰어들겠지. 그렇기 때문에 기유 씨와 그런 약속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 기유 씨는 그런 내 생각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너는, 그런 점까지 변하질 않는군.”

 

그 말을 하는 기유 씨에게선 굉장히 괴로워하는 냄새가 났다.

 

 

 

어쨌거나 그렇게 기유 씨는 말을 끝내더니 옷을 갈아입고 오라며 나를 탈의실로 떠밀었다. 폐점 시간도 가까이었고, 나도 오늘 더 이상 근무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해 나는 얌전히 유니폼을 벗고 가방을 챙겼다.

 

내가 짐을 챙겨 나오자, 기유 씨는 곧바로 나를 들어올렸다. 공주님 안기라거나 하는 낭만적인 모양새가 아니라, 표현 그대로 나를 짐짝처럼 옆구리에 꿰어버린 것이다.

 

“집으로 간다.”

“자, 잠깐만요 기유 씨. 일단 내려주세요! 나, 다리를 다친 게 아니라고요!”

 

내가 그렇게 말해도, 기유 씨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나는 팔다리를 버둥대며 기유 씨에게 들린 채로 젠이츠와 시노부 씨에게 인사를 해야만 했다. 아니, 인사라고 할 수도 없이, 기유 씨에게 들려서 멀어져가며 먼저 가보겠다고 이야기한 게 전부였다. 뭐야, 기유 씨의 이 완력은?

 

내가 허우적대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로 길을 걷던 기유 씨는, 중간 쯤 와서야 나를 내려놓았다. 그러고선 하는 소리가 이거였다.

 

“집으로 안내해. 어느 쪽으로 가면 되지?”

 

저, 기유 씨. 그것도 물어보지 않고 날 여기까지 운반했나요?

 

 

다행히 나는 나머지 절반은 내 발로 걸어서 갈 수 있었다. 기유 씨에게 물어보자, 내가 별다른 반응이 없어서 자신이 제대로 집을 찾아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고작 그 정도 반응으로 거기까지 알아냈다면 그건 그거대로 대단하다.

 

나를 앞세운 기유 씨는 마치 보디가드처럼 내 뒤에 붙어서 나를 호위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저 모퉁이에 있는 편의점을 지나면 바로 내가 사는 아파트가 나온다.

 

“저, 기유 씨. 제가 사는 집은 저 건물입니다.”

“그런가.”

“네!”

 

기유 씨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 말은, 여기서부터는 안전하니까 괜찮다는 뜻이었는데. 당황하는 사이에 우리는 어느새 아파트 복도였다. 여기까지 왔는데 기유 씨를 그냥 돌려보낼 순 없어서, 나는 가방을 뒤져 열쇠를 찾으며 기유 씨에게 차를 권했다.

 

“기유 씨. 좁지만……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하시겠어요?”

“차?”

“평범한 티백이지만요.”

“좋다.”

“네에, 그럼. 들어오세요.”

 

나는 열쇠를 손에 쥐고 문을 열었다. 아직 가족들도 바빠서 와보지 못했는데 처음 초대하게 된 게 기유 씨라니.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다. 그나저나, 차를 권하기는 했는데 티백이 있긴 했던가. 이럴 거면 아까 편의점에라도 들리는 게 좋았다고 투덜대며 나는 신발을 벗었다.

 

“저……. 기유 씨? 왜 그러세요?”

 

기유 씨는 문 밖에 기둥처럼 서 있었다. 현관이 너무 좁아서 못 들어오나. 물론, 엄청나게 좁긴 하지만. 나는 재빠르게 내 신발을 한쪽 구석으로 치우고, 문에서 비켜섰다.

 

“자! 들어오세요.”

“…….”

“죄송한데, 손님용 슬리퍼가 따로 없어서……. 이거라도 신어주세요.”

“슬리퍼는 됐어.”

“그래도요.”

 

나는 기유 씨의 대답을 듣지 않은 채 부엌으로 종종대며 걸어갔다.

 

하지만 혼자 산다는 건, 집 안의 모든 생활용품이 1인용이라는 뜻이다. 나는 그 사실이 이렇게 체감이 된 적이 없었다.

 

손님용 슬리퍼가 없어서 기유 씨에게 내 슬리퍼를 준 것까지는 좋았다. 뭐, 기유 씨는 지금도 신고 있지 않지만. 생수도 제대로 있었고 티백도 있었다. 거기까지도 좋았다. 그렇지만 설마, 찻잔이 하나밖에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행히 유리잔이 하나 있어서, 기유 씨는 뜨거운 차, 나는 찬 생수에 티백이었다.

 

“여기요, 기유 씨.”

 

기유 씨에게 차를 건네고 나니, 문득 기유 씨에게 감사의 인사를 아직 하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다. 늦은 감이 있었지만, 나는 기유 씨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 기유 씨! 아까는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너무 놀라서 감사가 늦었습니다. 기유 씨가 아니었더라면 정말 큰일이 났을 거예요.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렇게 달려드는 상대와 대치하는 건, 남들은 평생 살면서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일인 것이다. 기유 씨가 아니었더라면……. 죽지는 않았어도 엄청난 일이 일어났겠지. 기유 씨가 나에게 화를 낸 것도 이해한다.

 

“감사를 받으려고 한 건 아냐. 그러니 감사는 필요없다.”

 

기유 씨는 그 말을 하며, 아까 매장에서처럼 내 머리를 천천히 만졌다. 대단히 서투른 손짓이었다.

 

“게다가 너는, 그런 일로는 죽지 않아.”

 

으음. 왜 무모하게 굴었냐며 내게 화를 낸 남자는 어디로 가버린 거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눈을 굴리고 있는데, 차를 한 입 마신 기유 씨가 툭 말을 내뱉는다.

 

“내가 있으니까.”

“……ㄴ, 네?”

 

뭐지, 이건? 낚시 멘트? 나는 얼이 빠져 기유 씨에게 더 묻는 것도 까먹은 채로, 멍하니 기유 씨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기유 씨의 얼굴은, 마치 당연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 마냥 평온했다. 기유 씨에게서 풍기는 냄새도 그랬다. 그래서 나는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싸구려 낚시 멘트 같은 게 아냐.

 

진심인 거다. 이 남자는.

 

하지만, 어째서?

 

 

 

 

 

◇◇◇

 

 

이 패스트푸드 매장 아르바이트의 장점은 시프트 신청이 자유롭다는 거다.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도 본인이 원한다면 아예 시프트를 신청하지 않고 휴가를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약 사일 간의 휴가를 내고 본가에 와 있는 상태다.

 

형아가 보고 싶다는 동생들의 연락도 있었고, 아르바이트와 학업에 바빠 최근 본가에 들린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가족들은 만류했지만 오랜만에 빵집의 계산대에 서니 또 느낌이 달라 새롭고 즐거웠다. 어머니와 호흡을 맞추며 빵을 반죽하는 일도 오랜만이었다. 잊으면 안 된다. 졸업하면 나는 다시 여기에 돌아올 생각이니까.

 

사일 간의 휴가에는 빵집의 정기휴일도 끼어 있었다. 동생들은 오랜만에 만난 내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전에는 실컷 동생들과 장난을 쳤고, 오후에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유품 정리를 했다. 사실 휴가의 가장 큰 목적은 이것이다.

 

「미안, 탄지로. 엄마 혼자 정리하기에는 조금 벅차서」라고 어머니는 이야기했지만, 오랜만에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아버지를 추억하는 건 마음 어딘가가 아프면서도 충만한 일이다.

 

“어머, 이게 여기 있었네. 탄지로도 볼래?”

 

어머니가 소녀처럼 눈을 반짝이며, 낡은 공책을 하나 꺼냈다. 가장자리의 색이 바랜 오래된 공책의 표지에는, 아버지의 단정한 글씨로 『탄지로의 성장일기』라고 적혀 있었다.

 

“어, 이게 뭐야 엄마? 난 처음 보는 걸.”

“후후, 탄지로가 어릴 적에 아빠와 엄마가 같이 쓰던 육아일기야. 타케오가 자라면서는 바빠서 거의 쓰지 못했지만.”

 

다른 아이들은 만들지 못해서, 탄지로의 일기만 있단다. 어머니가 작게 속삭였다.

 

“읽어 볼래?”

“응!”

 

나는 조심스레 어머니에게서 공책을 받아들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의 글씨가 번갈아가며 나왔지만, 중간부터는 아버지의 글이 많았다. 아마도 네즈코가 태어났기 때문이겠지. 나의 성장일기라고는 하지만, 네즈코의 이야기도 있었다.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는데, 한 문장이 눈에 박혔다.

 

『탄지로가 깨어났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분명 심장이 멈추었다고 들었는데. 기적, 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다고 한다』

『탄지로가 시치고산을 넘기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못했다. 신이시여, 아이를 데려가지 않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날짜를 보니, 내가 세 살이 되기 직전이다. 나, 어릴 적에 사고가 난 적이 있었나? 그것도 죽을 뻔한 정도로 큰 사고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내가 기억하는 사고는, 어릴 적 타케오가 잘못 넘어뜨린 주전자에 이마를 데인 것뿐이다. 내 왼쪽 이마에 흉터를 남긴 사고. 그것만 빼고는 난 지금까지 무탈하게 살아왔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어머니는 그 사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았다. 내가 거의 죽을 뻔한 사고라고 했지. 그런 일을 떠올리는 건 어머니로서도 힘들 것이다. 어머니는 그 사고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말하는 대신, 내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와 자신이 얼마나 행복했고 신에게 감사했는지를 말해 주었다.

 

“참, 그때 깨어나서 탄지로가 했던 말이 있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네.”

“내가? 뭐라고 했는데?”

“「검은 옷을 입은 형아」가 데려다줬다고 했어.”

 

검은 옷을 입은…… 형.

 

어머니의 말은 이어져서, 나는 한 손에는 공책을 쥐고, 어머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탄지로가 말을 하게 되면서 가끔, 검은 옷을 입은 형아가 항상 놀아준다고 했지. 우리를 대신해서 항상 곁에 있어주니까 괜찮다고……. 그래서 우리는 그게 탄지로의 수호신이라도 된 게 아닐까 했어.

 

“자아, 여기도. 보렴.”

 

어머니가 보여준 건 내가 아주 어릴 적에 썼던 편지였다. 편지보다는, 그냥 그림이라고 하는 쪽에 가까웠다. 스케치북을 북 찢은 것 같은 종이 위에는 엉망진창으로 다섯 명이 그려져 있었다. 어렸을 때의 나는 뭘 그리고 싶었던 걸까?

 

“여기가, 엄마. 이쪽이 아빠. 우리 둘 사이에 손잡고 있는 아기가 아마도 네즈코. 탄지로는, 이쪽에서 엄마 손을 잡고 있어. 그리고 이쪽을 보면.”

 

어머니가 특별히 가리키지 않아도 나는 알 수 있었다. 까만 천을 뒤집어 쓴 것처럼 서툴게 그려놓은 사람이 하나. 검은 옷을 입고, 긴 머리를 묶었다.

 

“뭔가……. 이거.”

 

귀신? 사신死神?

처음 든 생각은 그거였다. 꺼림칙하니까 입 밖에는 내지 않았지만. 그런 내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어머니가 웃었다.

 

“후후. 탄쥬로 씨도, 나도 처음에는 많이 놀랬는데. 조금.. 무섭지? 그런데 어머님이, 탄지로를 지켜주는 존재라면 그게 무엇이든 좋은 거 아니냐고. 나쁜 존재는 아닌 것 같다고도 하고, 우리가 좋은 마음으로 정성껏 기도하자고 하셔서. 실제로도, 탄지로는 살아났고 말야.”

 

어째서일까, 매일같이 나의 근무일마다 오곤 하는, 며칠 전에도 나를 구해준― 검은 옷의 기유 씨가 생각나버리는 건. 기유 씨의 이야기를 들은 젠이츠도, 그 사람 혹시 귀신이냐며 떨었었지.

 

「게다가 너는, 그런 일로는 죽지 않아.」

「내가 있으니까.」

 

당신은 그때 그런 말을 했었죠, 기유 씨. 더없이 진심으로.

혹시 나를 구해준 게…….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던 건가요?

 

 

 

 

그날 나는, 기유 씨가 나오는 꿈을 꿨다.

 

아아, 나는 어쩐지 알 수 있었다. 그야 내가 경험했던 일이니까.

그러니까. 이건 내가 「죽던 날」이다.

 

나는 병원 응급실 같은 곳에 누워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머리 한쪽에서 피가 엄청나게 나고 있다. 타케오한테 넘어지는 주전자를 막으려다 다쳤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다친 건 이 사고였나. ...부모님이 그런 부분까지 거짓말을 하실 리는 없으니, 타케오를 지키려다가 내가 대신 다친 사고였을 테다.

 

탄지로!!!!

어디선가 날카로운 비명이 들리고,

안 돼, 숨을 쉬지 않아,

절망적인 목소리가 들린다.

 

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이제 침대에 앉아 있었다. 동시에 침대에 누워 있는, 피투성이지만 창백한 낯빛의 어린 내가 보인다. 아버지가 침대에 누워 있는 내 손을 잡고 엄청나게 울고 있다. 침대에 앉아있는 내 몸과, 침대에 누워있는 내 몸은 가느다란 실로 연결되어 있다. 누가 스치기만이라도 하면 툭 끊어질 것 같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의사와 간호사 서넛이 달려들어 어린 내게 이것저것 시도하지만 귀를 찢는 것 같은 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그저, 침대에 앉아 그런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다.

 

탄지로.

 

그런데 그런 나를 덥석 붙드는 손이 있었다. 창백한, 커다란 남자의 손이다. 그 손을 따라 시선을 돌린 곳에는.

 

―기유 씨가 있었다.

 

기유 씨는, 꽤나 특이한 차림새를 하고 있다. 머리에는, 이상한……. 조금 섬뜩한 해골 모양의 가면을 달고 있고. 검은색 하카마 같은 옷을 입었는데, 노란색과 연두색이 섞인 귀갑무늬 천이 누더기처럼 군데군데 기워져 있었다. 발에는 검은색 타비를 신고 붕대 같은 것로 각반처럼 정강이를 잡아맸다. 그리고 겉에 입고 있는 것은……. 해골무늬가 그려진 하오리? 아니, 아니다. 검은색 후드다, 이건. 게다가 한 손에는 쇠사슬에 낫까지.

 

사신……?

조금 무섭다. 이런 건 처음 본다. 기유 씨는…….

 

나를 붙잡은 기유 씨의 손은 굉장히 차가웠다. 얼음물에 오래 담갔다가 빼낸 것처럼. 지금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기유 씨가……. 인간이 아닌 존재라는 것을.

 

기유 씨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나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대신 불경을 외우듯 기유 씨는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용이 궁금해진 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탄지로. 반드시, 내가 지킬 테니까.

이런 데서 죽게 둘 것 같아.

내가……. 내가, 얼마나. 널 얼마나, 오래 기다렸다고 생각하는 거냐.

이번 생의 너는 누구에게도 다치지 않고, 누구를 죽이지도 않고, 누구를 지키려고 할 필요도 없어. 너는 내가 지킬 테니. 그것만큼은 이번 생에서도 변하지 않아. 너는 그저―

 

아. 기유 씨. 설마 당신은 정말로, 이때부터 날 지켜주고 있었나요.

이 꿈은 마치 이전에도 나를 구해준 적 있냐는 나의 궁금함에 대한 답변 같았다.

 

그 순간 기유 씨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곧바로 잠에서 깨어났다.

 

 

 

 

 

◇◇◇

 

“사신은, 인간을 죽게 하거나, 인간에게 죽을 마음을 먹게 한다고 여겨지는 신이다. 본 항에서는 일본의 종교, 고전, 민간신앙, 대중문화에 있어서의 사신에 대해 기술한다…….”

 

나흘간의 휴가가 끝나고, 나는 다시 대학교 근처의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이틀 전 꾼 꿈에 대해서 어머니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사신.

 

그러니까 죽음의 신이다. 기유 씨는 정말로 사신인 걸까? 정말로? 인간이 아닌, 그런 존재인 걸까? 이틀 동안 수없이 그 생각을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기유 씨에게 무서운 감정이 든다거나, 겁이 나지는 않았다.

 

“불교에서 사마는 인간을 죽고 싶어지게 만드는 마물로, 이에 홀리면 충동적으로 자살하고 싶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어 사신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아니, 아니 이게 아니지, 기유 씨는. 아무래도…….”

 

지금의 나는 기유 씨가 그런 존재라는 절대적인 확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유 씨를 사신이라고 가정하면 많은 것들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가 있다. 다른 크루들이 기유 씨에 대해 인지하지도 못하는 점, 어렸을 때나 며칠 전에 나를 구해준 점, 자신이 있으니까 나는 죽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들까지 전부 다.

 

나는 읽고 있던 위키피디아의 웹페이지를 건성으로 훑어보았다. 혹시 뭐라도 알만한 게 있을까 싶어서였다. 지금 보고 있는 건 일본의 사신에 관한 페이지였지만, 기유 씨를 생각나게 하는 설명은 한 줄도 없었다. 기유 씨는, 나를 죽이지도……. 죽고 싶게 만들지도 않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서양의 사신 페이지로 넘어갔다.

 

“서양의 사신. 일반적으로 낫을 가지고 블랙을 기조로 한 허름한 로브를 입은 인간 백골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미라화 되었어간, 백골화 된 말을 타고 있는 것도 있다. 큰 낫은 반드시 누군가의 영혼을 잡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사신의 낫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바쳐야 한다.”

 

나는 꿈에서 본 기유 씨의 차림을 떠올렸다. 음, 이 설명은 조금 기유 씨에게도 들어맞는다. 하지만 이 내용도 복장 정도를 제외하면 기유 씨와 아무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삐삐삐삣!

 

혹시 지각을 할까봐 설정해 둔 알람이 울렸다. 좋아! 아르바이트 갈 시간이다.

 

이렇게 혼자 생각해봐도 소득은 없다. 만약 오늘 기유 씨가 온다면, 기유 씨에게 물어보자. 그리고……. 감사하다고도 하자. 어렸을 때의 일에 대해서도.

 

 

 

 

오늘의 아르바이트는 평소보다 바빴다. 저녁에 햄버거 단체 주문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일찍 햄버거를 만들어두어도 쓸 수가 없어서, 오후부터 로비를 보는 크루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그릴에 투입되어 열심히 패티를 굽고 재료를 손질해야만 했다. 평소에는 주로 로비에만 있는 나조차도 손님이 없을 때는 백룸으로 들어가 햄버거 만들기를 돕거나 미친 듯이 감자를 튀겼다. 햄버거 주문이 무사히 끝나고 난 다음에는 그 시간동안 못했던 청소를 몰아서 했다. 기유 씨가 오늘은 올지, 온다면 어떤 이야기부터 하는 게 좋을지, 그런 생각들은 일 때문에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 어어……. 기유 씨. 안녕하세요.”

 

망했다...!

쉴 새 없이 햄버거를 만드느라 지금 내 온 몸에서는 패티 냄새가 났다. 내가 코가 좋아서 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머리카락 한 올에서까지도 고기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유니폼 앞치마뿐만 아니라 상의에도 군데군데 햄버거 소스가 튀어 있었다.

 

나, 분명 오늘 기유 씨의 정체에 대해 말하려고 했었지. 이런 꼴로는 아무래도 좀 무리다. 생명의 은인일지도 모르는 남자에게 고기 기름 냄새를 풍기며 감사를 표하는 건 아무래도 피하는 게 좋지 않을까. 나는 쭈뼛대며 기유 씨에게 말을 걸었다.

 

“저, 기유 씨. 주문, 하시겠어요?”“……탄지로.”“네, 에, 네?”

 

기유 씨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무슨 일이라뇨, 그런…….”

 

무슨 일. 있었죠. 그릴은 거의 배워본 적도 없는데 엄청나게 고기를 튀기고, 감자도 튀기고. 기유 씨가 오기 전에야 겨우 오후에 해야 했던 청소가 끝났고요. 만신창이가 된 크루들은 지금 잠시 스태프룸에서 쉬고 있어서 기유 씨가 햄버거 주문을 한다면 제가 백룸에서 그것도 쳐내야 하고요. 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가 없어서, 나는 대단히 축약한 이야기를 기유 씨에게 들려주었다.

 

“큰일은 아니지만, 오늘은 기유 씨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도, 듣고 싶은 것도 꽤 있었는데……. 일을 하다 보니 패티 냄새가 좀 나서요. 그게 좀 부끄러웠습니다.”

“……패티 냄새?”

“네. 햄버거에 들어가는 고기 말이에요.”

“그런 냄새가 나는 것도 같군.”

 

기유 씨가 살짝 냄새를 맡아보더니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더니, 곧 눈을 마주치고, 무심하게 이런 말을 한다.

 

“신경 쓰지 마라. 피 냄새 같은 것보단 이쪽이 훨씬 좋으니까.”

 

기유 씨. 그거 기유 씨 나름대로의……. 그러니까, 격려죠? 표현은 낯설었지만, 그래도 기유 씨의 마음만은 알 수 있어서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기유 씨의 주문을 받았다. 오늘은 내가 기유 씨의 햄버거를 만드는 거니까. 특별히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과 함께였다.

 

 

언제,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밀린 로비 청소를 하며, 나는 멀리서 기유 씨를 흘끔대며 훔쳐보았다. 원래도 특별히 뭔가를 계획하고 있던 건 아니었는데, 오늘은 유독 바쁘게 움직이다보니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났다.

 

기유 씨가 어떤 존재인지를 꼭 알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어릴 적에 날 살려준 게 정말 기유 씨가 맞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반드시 감사를 표하고 싶을 뿐이다.

 

아, 잠깐.

 

내가 고민하고 있는 사이, 기유 씨는 햄버거를 다 먹은 건지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기유 씨는 가버린다. 나는 마음이 조급해져서, 기유 씨에게로 뛰어갔다.

 

“저, 기유 씨.”

“왜 그러지, 탄지로.”

“저, 그러니까. ……햄버거는, 맛있었나요?”

 

아아, 바보!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잖아! 기유 씨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오히려 내게 질문했다.

 

“출근하지 않는 동안, 본가에 갔다고 들었다. 집 안에서 무슨 일은 없었나?”

“일이요? 네에. 그런 건, 당연히.”

 

없었습니다! 『탄지로의 성장일기』를 발견하기 전까지는요!

 

나는 순간, 포기했다. 그러니까 기유 씨에게 어떤 식으로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듣고, 감사를 표할지 생각하는 것을 전부 포기해버렸다. 지금이 아니면 기유 씨에게 솔직하게 물어볼 수 없을 것 같았고, 다른 기회를 노린다고 해도 내가 더 얼마나 잘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기유 씨가 그 「검은 형아」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 사람은……. 나를 비웃거나 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저, 기유 씨. 조금 사적인 이야기지만요. 이번에, 제 어머니에게서 어릴 적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기억하지 못했는데 제가 어릴 적에 크게 다쳤...고, 그런 저를 구해준 사람이 있다는 거였어요.”

“…….”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죄송하지만, 혹시……. 기유 씨가.”

 

저를 구해준 사신 님이, 아닌가요?

 

 

 

기유 씨는, 앉은 채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앉을 생각도 못하고 초조하게 그 앞에 서서 기유 씨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리자, 기유 씨가 겨우 내놓은 대답은,

 

“알아버렸구나. 내가 누구인지.”

 

라는 말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상당히 서투른 시도처럼 보이지만 기유 씨는 특별히 내게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할 생각이 없었던 걸까. 기유 씨의 조금 일렁이는 감정이 냄새로 느껴진다. 그 종류까지는……. 알 수 없지만. 지나치게 차분한 기유 씨를 앞에 두자, 지난 이틀간 기유 씨에게 하려고 생각했던 말들이 형편없이 흩어진다. 그간의 고마움, 놀라움, 감탄, 뭐 그런 것들이. 그래서 나는, 나의 생명의 은인에게 겨우 이런 말밖에 못 했다.

 

“저, 기유 씨. 그때 저를 구해주신 것, 그리고 며칠 전에도……. 저를 구해주셨죠. 어떻게 감사를 갚아야 할지…….”

“그런 걸 바라고 한 게 아니니 필요 없다.”

“좀 더 일찍 말해주셨으면 좋았을 거예요. 지금까지 저는, 하나도 몰라서……. 그게 다 기유 씨 덕이라는 걸.”

 

나의 생명의 은인은, 내게 놀랄 기회도, 감사할 기회도 주지 않으려는 걸까. 기유 씨에게서는 약간, 곤란한 냄새가 났다.

 

“……탄지로. 내가 무엇을 말해도, 네가 어떤 것을 알아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넌 그저 지금처럼, 살아가면 된다. 나 같은 존재를 네 영역에 넣어두지 마라.”

 

아, 정말이지. 기유 씨. 당신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나는 소스가 형편없이 묻은 앞치마를 움켜쥐고, 기유 씨를 향해 내키는 대로 말을 쏟아냈다.

 

“그건 치사합니다! 아무리 기유 씨가 제 생명의 은인이라고 해도, 나, 그런 말만은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요! 저도 뭔가 기유 씨에게 돌려드리고 싶어요. 아니. 감사하게 해 주세요. 그럴 거니까요! 이렇게 일생의 신세를 지고 있는 걸요.”

 

목소리가 너무 컸다. 지나치게 내 말만 해버렸나. 기유 씨는 조금 멍한 표정으로 내 말을 듣더니,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아주 조금 쓸쓸한 냄새를 풍겼다.

 

“신세라니, 탄지로.”

 

―그런 생각은 하지 마라.

 

“나의 이기심에 네가 어울려주고 있는 거다.”

 

나의 말에 기유 씨가 왜 이런 대답을 하는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기유 씨의 기분만큼은 내게 전해진다.

 

내가 꾼 꿈, 아니 어릴 적 기유 씨가 나를 구해줬을 때. 그때의 나는 아버지의 말대로 시치고산을 넘기지도 못한 나이였다. 꿈에서 본 기유 씨는 그랬지. 자신이 얼마나 날 오래 기다렸는지 아냐고.

 

나를 계속 기다려서, 내 목숨을 구해 준 사신. 그거 조금, 사신이 아니라.

수호신 같은 걸요, 기유 씨.

 

 

기유 씨가 어떤 존재인지 답을 들었는데도, 기유 씨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나를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 왜 나를 지켜주고 있는지, 그런 것에 대해 조금쯤은 먼저 기유 씨가 이야기를 해 줄 줄 알았는데. 그저 이 일련의 대화의 흐름이 지나치게 잔잔하다. 이것도 기유 씨 특유의 분위기와 관계가 있는 건가.

 

기유 씨는 트레이를 다 비운 상태로 자리에 앉아있고, 나는 로비 청소를 하는 중이라는 어정쩡한 위치였다. 하지만 나는 궁금증을 이길 수가 없어, 가장 궁금한 것을 물어 보았다. 그것은,

 

“저, 그럼 기유 씨가 저와 처음 만난 건 언제였나요?”

“그건…… 아마도.”

 

기유 씨의 시선이 허공을 더듬는다. 그러더니, 대답에 조금 뜸이 들었다.

 

“백 년쯤 전이다.”

“뭔가요. 분명 농담이죠, 그거.”

“…….”

 

아. 기유 씨의 분위기가 일순 변했다. 기유 씨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커다란 파문이 일렁대는 그 군청색 호수를 보고, 나는 알아버리고 만 것이다.

 

아, 이건 농담 같은 게 아니구나.

깨닫는 순간 등에서 땀이 흘렀다.

 

솔직히, 전혀 기억나지 않아. 백 년 전이라니? 난 지금 겨우 스무 살인걸. 두 살 때 죽을 위기를 넘겼던 것도, 아니 실제로 한 번 죽었다가 토미오카 씨 덕에 살아난 것도 얼마 전에야 기억해낼 수 있었어. 그런데.

 

기유 씨가 불쑥 자리에서 일어난다.

 

“…탄지로. 역시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은 전부 잊어라.”

“네?”

“뭐가 됐든 지금의 너와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니까.”

“어, 아니, 저기! 기, 기유 씨! 잠시만요!”

 

기유 씨, 당신 얼굴이……

 

“기유 씨이!”

 

내 말은 무시한 채, 기유 씨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통성명을 한 뒤로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고 가버리는 기유 씨는 처음이다. 나는 기유 씨를 잡지도 못하고, 멍하니 기유 씨가 나간 유리문 너머를 쳐다보았다. 기유 씨의 동선을 따라 그가 남기고 간 기분의 냄새가 났다……. 잠깐, 이럴 때가―

 

“저기요! 기유 씨!”

 

나는 허겁지겁 일어나 유리문으로 달려갔다. 기유 씨! 바로 뒤따라 나왔는데도, 거리에 기유 씨는 보이지 않았다.

 

 

로비를 비울 수가 없어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돌아왔다. 급하게 일어난다고 내가 넘어뜨린 청소도구를 바로 세우고, 하던 청소를 마무리 지었다. 평소에는 즐겁던 매장 청소도 지금은 별로 즐겁지가 않다.

 

“기유 씨…….”

 

그래, 기유 씨가 아까 한 말은 분명 나를 위한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오늘 나눈 대화로 알게 된 것들을 너무 무겁게 받아들여서, 그걸 껴안고 가라앉지 말라는 거겠지. 기유 씨의 상냥한 배려만큼은 아주 잘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백 년이다. 나는 짐작도 할 수 없는 시간. 백 년도 더 전에 살았던 전생의 나와 기유 씨. 솔직히 농담이죠, 하고 한 번 더 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거, 진담인 게 분명하니까.

 

백 년 전. 뭐랄까, 전혀 현실감이 없다. 백 년 전의 내가 지금의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도 그다지 들지 않는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날의 다섯 배를 살아야 백 년이 된다. 못해도 연호가 세 번은 바뀌었을 시간이다. 내가 두 살 때 죽을 위기를 넘겼던 것도, 아니 실제로 한 번 죽었다가 기유 씨 덕에 살아난 것도 얼마 전에야 기억해낸 참인데.

 

하지만 기유 씨. 잊으라니, 그렇게 말해도 그거 가능한가요.

무엇보다도 나, 그만 봐 버렸습니다. 잊으라는 말을 할 때의, 당신의 표정을.

그건 분명 끔찍하게 상처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얼굴이었는걸.

 

“기유 씨…….”

 

나는 그대로 환한 매장 안에 홀로 남겨졌다.

백 년이라는 시간과 함께.

 

 

 

 

 

◇◇◇

 

 

그 다음날부터 기유 씨는 매장에 오지 않았다.

 

내심 기유 씨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예상은 멋지게 어긋났다. 매일 나는 밤 열시부터 기대를 했다가, 열두시부터 실망을 하는 일을 반복했다.

 

“오늘도 없나…….”

 

나는 퇴근길의 밤거리를 훑어보았다. 며칠 새 내게는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틈만 나면 주위를 둘러보는, 조금 정신없는 버릇이다.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에도, 집에서 다른 일을 할 때에도 문득문득 고개를 들어 허공을 본다. 왠지 시선 끝에 기유 씨가 있을 것만 같아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기합을 넣지만,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일을 하면서도 계속 매장 입구를 힐끔 쳐다보게 된다. 평소의 나로서는 용납이 어려운 일이다.

 

오늘만 해도, 간만에 시프트가 겹쳐 같이 일하게 된 젠이츠는 저녁을 먹으면서 나의 걱정으로 수다스러웠다. 뭔가 일이 있는 거냐고 물어보면서도 그 날 밤의 난동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보니, 젠이츠가 무언가를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특별히 큰 오해도 아니어서 달리 정정하지 않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젠이츠에게 기유 씨의 일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내가 항상 이야기하던 그 잘생긴 손님이 사실은 어릴 적부터 나를 지켜주던 사신 씨였는데, 갑자기 내 앞에서 사라져버려서 그 사람을 찾고 있는 거라고 하면. 착하고 상냥한 젠이츠라고 해도 내 말을 믿어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

 

차도가 한적해서, 차량이 없어진 틈을 타 어디선가 익숙한 냄새가 내 코에 흘러들어 왔다.

 

기유 씨다. 이건 기유 씨의 냄새다!

오른쪽? 고개를 들자 육교가 보인다. 저 육교 위인가. 길 반대편 쪽에서 기유 씨의 냄새가 난다.

 

“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어쩐지 그 곳에 기유 씨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의 판단을 믿고 걸어보기로 했다.

 

“저기! 기유 씨이!!”

 

왓! 잠깐, 기유 씨의 냄새가 갑자기 옅어진다. 기유 씨가 내게서 멀어지고 있는 거다. 내 얼굴을 보기 싫은 건가? 날 피하는 건가?

 

“기유 씨!!! 저예요, 카마도 탄지로입니다!!”

 

차도의 반대편으로. 기유 씨를 잡아야만 한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도로에 발을 디뎠다. 횡단보도 같은 건 당연히 없고, 육교로 올라가기엔 그럴 시간이 없다. 이성이 어딘가 마비되어 버린 것만 같다. 기유 씨를 잡아야만 한다는 생각만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사신 씨와의 술래잡기라니, 이런 건 들어보지도 못했고, 인간인 내가 잡을 수 있을 리가 없는데도.

 

“―읏, 탄지로!”

 

아, 드디어 보인다. 기유 씨가, 나를 돌아봤다.

 

기유 씨는 언제나의 그 검정 옷이 아니었다. 해골 모양의 가면, 검정 후드, 초록과 노란색 천을 군데군데 꿰맨 검은 옷. 꿈에서 봤던 그 옷차림이다.

 

“아…….”

 

기유 씨가 조금 놀란 표정을 하고 있어서, 나는 그제야 내가 도로와 인도의 사이의 턱에 걸려 넘어졌다는 걸 알았다. 엉망진창으로 넘어져서 무릎과 정강이가 엄청나게 까지고, 팔꿈치나 턱 부분이 쓸린 것 같지만 그런 것에는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다. 지금이 아니면 기유 씨는 없다.

 

내가 넘어진 걸 알아차리자마자, 기유 씨는 눈도 깜빡이기 전에 내 곁으로 다가와 날 안아서 인도로 끌어 올렸다. 조금 전까지 나에게서 도망치고 있었으면서 망설이지조차 않았다. 그와 동시에 요란한 경적 소리를 내며 트럭이 지나간다. 나는 기유 씨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겨우, 잡았다. 기유 씨…….”

“정신이 나간 거냐?! 왜 이렇게 위험한 짓을 해!!”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기유 씨에게 사과하고 싶었어요. 기유 씨, 죄송해요. 그런 말을 해서…….”

 

내가 그렇게 말을 하자, 기유 씨가 험악한 표정을 했다. 아, 기유 얼마 전에도 나는 기유 씨의 이런 냄새를 맡은 적이 있다. 그건 나의 무모함을 책망할 때였다.

 

“그런 건 필요 없어! 하찮은 일에 네 목숨을 걸지 마라.”

“하찮지 않아요!!! 전혀!!”

 

기유 씨는, 나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걸었다. 그런 기유 씨와 다시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아니, 제대로 사과를 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도 뭔가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왜 나의 감사도, 사과도 받지 않나요. 왜 항상 그것이 당연해서, 필요 없다고 하는지.

 

“기유 씨……. 이제 저를 보러오지 않을 건가요?”

 

바보같아. 겨우 이런 거나 물어보다니. 아니, 아닌데. 고작 나를 보러 올지, 보러 오지 않을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닌데...

 

“그래.”

 

기유 씨는 즉답했다. 정말로? 정말 안 와? 기유 씨의 옷자락을 잡은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다.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가지 말았어야 했어. 지금까지처럼, 너를 뒤에서 지켜보기만 했어야 했는데.”

 

기유 씨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기유 씨의 고독이 나를 뚫고 온다. 아, 저 깊이를 알 수 없는 쓸쓸한 군청. 기유 씨에게서 지독한 후회의 냄새가 난다.

 

“참을성이 없었다. 자제하지도 못했고. 엉뚱한 것에 취해서, 한심하게 굴었다. 나는 정말 구제불능인 남자다.”

 

제발, 기유 씨. 그런 말만은.

나 때문에 기유 씨 자신을 상처 입히는 건 그만둬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울고 있나? 시야가 조금씩 흐려지는 것 같기도 하다. 내 몸의 감각이 다른 차원의 것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기유 씨와 내가, 꼭 어딘가로 떨어진 것만 같다.

 

“탄지로. 나는…… 네가 몇 번을 태어나도, 마지막에 너를 데리러 가는 건 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유 씨의 손등이 내 턱을 조심스럽게 건드린다. 조금 전 바닥에 쓸려 상처가 난 턱이다. 기유 씨의 손짓은, 금방이라도 터져서 사라질 비눗방울을 건드리는 것처럼 섬세했다. 나는 더 울 것만 같았다.

 

“하지만 너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이전과 같은 것을 네게 기대하고, 강요하게 되는 건 가혹한 짓이다. 바보같이, 그걸 이제 깨달은 거다, 나란 놈은.”

 

그 말을 하는 기유 씨는, 우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차마 위로할 엄두도 낼 수 없을 정도였다. 분명 기유 씨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운데, 나는 화상을 입는 것처럼 그 손이 닿은 턱이며 뺨이 전부 따끔거렸다.

 

“다시는 네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 생각이다. 너도, 나를 보지 못할 거다. 다른 사람들처럼.”

 

젠이츠가 생각났다. 분명 몇 번씩이나 기유 씨를 봤을 텐데도, 젠이츠는 그런 손님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기유 씨가 왔던 날에조차 젠이츠는 기유 씨의 얼굴은 고사하고 존재조차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건 역시 기유 씨의 능력이었다.

 

그러면, 나는요, 기유 씨?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되나요? 당신을 눈앞에 두고도 그게 기유 씨라는 걸 알아보지 못하고, 얼굴은 흐릿해지고, 돌아서면 나눈 대화를 잊고, 결국에는 있었다는 인식조차도 희미해지고.

 

이제 나에게서도 기유 씨가 그렇게 되어버리나요? 정말로?

 

그러면 밤 열한시에 기유 씨가 와서 내게 무슨 말을 걸어도, 우리가 어떤 대화를 나누어도, 나는 그게 당신인지 모를 거야. 기유 씨가 기간한정의 메뉴를 주문하는 데에 실패해도, 150엔짜리 커피를 마시고 애플파이를 먹고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나는 그게 기유 씨인 걸 모를 거라고.

 

“그러니 너는 이전처럼 살아가면 돼. 어렵지 않다.”

“싫어요!!!!”

 

반사적으로 비명이 샜다. 어린애가 떼를 쓰는 것 같이, 싫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기유 씨는, 모르지 않겠지. 전부 다 알고 있겠지. 기유 씨가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걸.

 

기유 씨. 당신은 정말, 정말 그걸로 괜찮아요?

 

“싫어요, 절대로 싫어요 기유 씨!! 기유 씨, 제발…….”

“…….”

 

기유 씨.

당신이 내 눈앞에서까지 사라지면 세상에 기유 씨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또 누가 있나요. 기유 씨에게는 누가 말을 걸지요? 누구와 날씨에 관한 잡담을 하나요. 당신은 누구와 떠들지요.

 

나의 상냥하고, 외로운 사신 씨.

 

새벽의 길거리. 도로에 엉망진창으로 구른 나를 기유 씨가 안고 있었다. 나는 절박하게 기유 씨의 옷자락을 붙들고 매달렸다.

 

“기유 씨, 제발……. 싫어요, 그건…….”

 

기유 씨가 손을 들어서, 내 눈을 가린다. 아, 시야가 흐려진다. 안 돼. 이런 곳에서……. 이런 때에. 기유 씨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이만 쉬어라. 탄지로.”

 

기유 씨의 말과 함께, 눈이 감겼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집의 침대 위였다.

 

기유 씨는 당연히 없었다. 아니, 어디에선가 나를 보고 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나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오른손에 감촉이 느껴져서 손을 들어보자, 검은 천이 쭉 따라 올라온다. 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기유 씨의 겉옷이다. 해골이 그려진……. 겉옷. 담요처럼 내 이불 위에 올라와 있었다. 옷자락을 놓지 않았던 나 때문에 올려두고 갔구나. 그런 거, 내 손을 비틀고 꺼내서 가져가버리면 그만인데.

 

나는 기유 씨의 겉옷을 끌어안았다. 언제나, 기유 씨 곁에 가면 슬며시 풍기곤 했던 냄새가 난다. 어떤 단어로 이 냄새를 표현할 수 있을까. 이걸 놓고 갔다는 건, 다시 받으러 오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죠……. 기유 씨.

 

그러고 보니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이 집. 월세가 이상하게 쌌고 중개료 같은 것도 턱없이 낮았다. 사례금은 아예 없었고. 그때는 워낙 파격적인 가격이라 앞뒤 생각도 없이 계약했지만, 이거, 사고물건이었던 거 아닐까. 정말 대책 없이 낙관적이었구나. 나의 안이함이 한심할 정도다.

 

그저 집이 전철역에서 좀 멀어서 그런 줄만 알았다. 치안이 썩 좋은 동네는 아니라고 듣긴 했는데, 매일 나이트 시프트를 마치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나쁜 일을 겪은 적도 없다. 그 취객 난동 사건을 제외하면. 지금까지는 그저 당연한 것이었는데, 이것도 기유 씨 덕분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있죠, 기유 씨.

나, 당신에게 나의 일상을 대체 얼마나 빚지고 있는 건가요?

◇◇◇

 

그 밤의 만남 이후로, 나는 기유 씨를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내가 근무하는 매장은 당연하고, 퇴근일이든, 어디에서든, 기유 씨의 냄새 같은 건 맡을 수 없었다.

 

기유 씨와 다시 한 번 만나기 위해 그날 밤처럼 차도에 뛰어든다거나, 위험한 짓을 하지는 않았다. 그건 지금까지 나를 지켜준 기유 씨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기유 씨가 나의 생명을 소중히 해주었다는 걸 알면서, 내 안전을 담보로 기유 씨를 협박하듯 굴고 싶지 않았다.

 

분명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겠지. 그리고, 언젠가는 나를 만나러 오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계절은 완연히 봄이 되었다. 바뀔 것 같지 않았던 크루들도 몇은 그만두고, 몇 명의 새로운 입사자를 받고 있는 중이다. 인력에 잠시 공백이 생겨, 나는 요 최근 나이트 시프트를 혼자 마감하고 있었다. 그날 밤의 취객 난동을 같이 겪었던 젠이츠나 시노부 씨의 걱정이 컸지만, 그 일 때문에 경비나 보안이 강화되었으니 큰 우려는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두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었지만, 나에게는……. 나의 사신 씨가 있다.

 

“읏샤.”

 

나는 로비의 불을 반쯤 껐다. 곧 폐점 시간이다. 오늘따라 손님이 없어서, 청소는 전부 여유 있게 끝났다. 그렇게 시계를 쳐다보며 자잘하게 내일 쓸 물품들을 정리하는데, 매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거기에는.

 

“기유 씨!”

 

나는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질러 버렸다. 근무자가 아무도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다시는 기유 씨를 보지 못할 것도 각오하고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나의 말은 어떻게 전해야 하지, 그렇게도 고민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기유 씨의 방문은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저. 주문, 하시겠어요?”

“…….”

 

기유 씨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나의 행동에 어울려 주었다. 메뉴를 추천해달라는 기유 씨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 아이스커피를 골라 주었다. 주문이 끝나도 기유 씨는 자리에 앉지 않고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려, 그것을 들고 평소의 지정석에 가 앉았다. 나는 이번에는, 그 커피를 엎지 않고 기유 씨에게 줄 수 있었다.

 

언제나의 자리에 앉아 아이스커피를 마시는 기유 씨. 내일도, 그 다음날도, 왠지 또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홀의 불이 반쯤 꺼진 매장. 근무자는 아무도 없고, 손님도 당연히 없다. 길 밖의 시끄러운 차량 경적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는다.

어딘가 외따로 떨어져서, 고요한 우주 속을 떠도는 느낌이다.

이것도 기유 씨의 능력인가. 나는 아직도 기유 씨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

 

기유 씨가 마시던 커피 컵이 다 비워졌다. 기유 씨는, 지체하지 않고 일어나서 컵과 트레이를 버리러 간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마신 컵과 트레이를 정리하는 기유 씨의 뒤로 다가갔다. 기유 씨는 내가 오는 걸 알고 있었을 것 같은데, 나를 피하지는 않는다. 트레이를 내려놓고 몸을 돌리는 기유 씨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시릴 정도로 차갑다.

 

“……탄지로.”

“저어, 이대로 들어주세요.”

 

여기서 꼭 다시 말하고 싶었다. 지난번엔 이곳에서 본의는 아니었어도 당신에게 상처를 입혀버렸으니까. 이런 말을 하기에 적절한 장소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패스트푸드 매장이 좋고, 여기서 일하는 것도 즐겁고, 하루에 한 번은 당신에게 오늘은 어떤 메뉴를 추천할지 고민하는 일도 기다려지니까.

 

게다가 그날 이후로 계속 생각이 난다. 쓸쓸하고 슬펐던 이 사신 씨의 상처받은 얼굴. 당신의 이미 울고 있었던 것 같은 눈동자. 공기를 짓누르던 당신만의 시간.

다시는 기유 씨의 그런 얼굴, 보고 싶지 않다. 그게 나 때문이라면 더더욱. 내게서 상처받는 당신도, 나 때문에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당신도 보고 싶지 않아.

내가 말했던 일생의 신세 따위도 잊어 줬으면 좋겠다. 그런 표현이 당신에게 어떻게 다가갔을지, 조금은 이해하기 시작했으니까.

 

나는 최대한 활짝 웃었다.

 

“나, 기유 씨를 좋아합니다.”

 

모든 걸 알아버렸어도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방법은 없다고, 그렇게 생각한다.

 

몇 번을 고민해봐도 역시 기유 씨가 기억하고 있는 과거의 나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내가 아는 카마도 탄지로는 지금의 나뿐이다. 이 카마도 탄지로는, 분명 기유 씨가 말한 그 과거와 백년은 떨어져 있다. 전생의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떻게 기유 씨와 만났는지, 왜 기유 씨만을 남겨두고 눈을 감았는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기유 씨가 나를 기다리며 보냈다던 시간도, 알 수가 없다.

전생의 기억을 내가 떠올리게 될까?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떠올리게 된다고 해도…… 지금의 나는 지금을 살아간다.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아.

 

하지만 그런 것들과는 관계없이, 나는 기유 씨를 좋아하고 있다.

 

몇 번이고 나를 걱정하고, 나를 위해 화를 내지만 그것마저도 다정한 냄새가 나는,

가끔 쓸쓸한 표정을 하고, 슬픈 냄새를 풍기며, 고독한 분위기로 조용히 150엔짜리 커피를 마시는, 뜨거운 애플파이를 천천히 식혀 먹고, 내가 추천한 커다란 햄버거를 작은 입으로 어떻게든 조금씩 베어 먹는,

나를 보러 밤 열한시마다 패스트푸드 가게에 오는 상냥한 남자.

 

내가 좋아하는 건 그런 기유 씨다.

 

“그러니 기유 씨도 나를 좋아해 주세요.”

 

‘지금의 나’를.

 

기유 씨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일그러진다. 짧은 신음소리 같은 게 샌 것도 같다. 그것은 마치, 연약한 짐승의 것처럼 애처롭고 가냘프게 들렸다.

 

기유 씨가 그대로 내 팔을 세게 끌어당겨서, 나는 기유 씨의 품 안으로 딸려 들어가 버렸다. 아, 나를 끌어안은 이 사신 씨에게선 내가 짐작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슬픔과 그리움의 냄새가 난다. 하지만 동시에 상냥한 애정의 냄새도 함께였다.

 

“탄지로.”

“…….”

“……언제나 네겐 이길 수가 없구나, 나는.”

 

그 떨리는 목소리가 조금 젖어 있는 것도 같았다. 기유 씨는 다시 내 이름을 조그맣게 부르더니, 말없이 나를 한동안 끌어안고 있었다. 뼛속까지 얼어버릴 듯 차가운 기유 씨의 품 안. 그곳이 지금의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처럼 느껴진다.

 

들리는 것은 오로지 나의 심장박동 뿐.

 

우리는 그렇게 조금 오래 우주를 떠돌았다.

 

 

 

 

 

 

◇◇◇

 

“앗, 기유 씨, 안녕하세요.”

“안녕, 탄지로.”

 

어김없이 오늘도 그 시각에 기유 씨는 온다. 동네의 조그마한 패스트푸드점, 주문이 종료된 메뉴도 있고, 폐점하기 직전의 조용한 밤. 이 시간에는 보통 손님이 없어서, 나는 카운터와 주변 청소를 몽땅 도맡아 한다.

 

“그래서, 오늘은 어떤 메뉴를 추천해주는 거지.”

“음, 분명 어제는 테리타마 세트였죠. 기간한정인.”

 

기유 씨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매년마다 봄 한정으로 나오는 부들부들한 써니사이드 업에 데리야키 소스가 첨가된 메뉴는 분명 나도 굉장히 좋아하는 것이다. 어제 기유 씨에게 추천한 메뉴 외에도, 치즈나 훈제 비프가 들어간 바리에이션이 있다.

그런 테리타마도 좋지만, 오늘 기유 씨에게 추천하고 싶은 메뉴는 따로 있었다.

 

“새로 나온 「사무라이 맥」은 어떤가요? 기간한정은 아니지만 이제 막 판매 시작한 메뉴입니다.”

“사무라이……?”

“네! 음, 그러니까, 간장 맛이 나는 소스에 아삭아삭한 슬라이스 양파가 들어간 신제품이에요. 소고기 더블 패티에, 체다 치즈 두 장이라 볼륨이 아주 풍성하고요.”

 

설명이 서툰 내게는, 메뉴의 설명이란 건 언제나 좀 어렵다. 이것만큼은 순발력으로 해결이 되지 않아 대개 본사에서 내려온 설명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우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쿠왁-하고 양파가 들어가고, 고기와 체다 치즈의 맛이 쿵, 하고 느껴진다고 말해버릴 지도 모르니까.

 

“네가 추천해주는 건 뭐든 좋다. 아니면, 다른 추천이 있나?”

“아뇨! 오늘의 추천은 이것입니다. 어쩐지, 「사무라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 기유 씨가 생각이 나서요. 본 적은 없지만 뭔가 검과 기유 씨, 잘 어울립니다.”

“……그런가.”

 

어라, 나 뭔가 실수했나. 물론 기유 씨는, 기본적으로 상냥한 사람이니까, 검을 쥐는 일 같은 건 없었을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사신 씨이고. 낫을 들고 있는 모습도 봤었고.

조금은 우왕좌왕하며, 나는 기유 씨를 올려다보았다. 기유 씨의 얼굴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데도, 기유 씨에게서 옅은 그리움의 냄새가 풍긴다.

 

“왜 그러지, 탄지로.”

“아뇨…….”

 

기유 씨에게서 그런 냄새를 맡을 때마다, 조금은, 여러 가지 것들이 궁금해진다. 나의 상냥한 사신 씨가 그리워하는 게 뭔지, 뭐 그런 것들이다. 하지만 딱딱한 나의 머리로도 짐작가는 대상이 있으니 아직은 물어본 적이 없다.

 

자자, 생각은 이쯤 하자. 나는 다시 기합을 넣고 포스기의 입력을 끝냈다.

 

“「사무라이 맥」 세트, 후렌치후라이와 콜라, 주문 받았습니다. 합계 790엔입니다. 기유 씨는 잇 인(eat in)이니까, 바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잠깐.”

“앗, 뭔가요 기유 씨?”

“추가 주문이 있다.”

“우왓, 네!”

 

기유 씨가 추가 주문이라니, 처음 있는 일이다! 뭘까? 그러고 보니 이 사무라이 맥 버거와 함께 나온 진저 음료가 있다. 사무라이의 실루엣이 전용 컵에 그려져 있는. 그걸 주문하고 싶은 걸까? 기유 씨에게선, 어쩐지 조금 긴장한 냄새가 풍기는 것도 같다.

 

“탄지로의 스마일 하나.”

“?!”

“……주문 불가능한 건가.”

 

아, 기유 씨.

 

“아뇨! 재고는 넉넉합니다!”

 

나는 그 언젠가 좋아한다고 말하던 날처럼, 기유 씨를 향해 활짝 웃었다. 교육받을 때 이 스마일 주문에 대해 들었지만, 실제로 내게 스마일을 주문한 건 기유 씨가 처음이다. 이걸 어떻게 알았냐는 건, 나중을 위한 질문으로 미뤄 두자.

 

충분한 스마일이 되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내 뺨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진다. 기유 씨가 작게 웃고 있었다. 처음 본 기유 씨의 웃음은 상상보다도 훨씬 더 근사했다.

 

“앞으로도 매일 주문하고 싶어.”

“기꺼이! 그건, 주문할 때마다 추가해 주세요.”

“아아.”

 

기유 씨가 고개를 끄덕이곤, 그럼, 하고 언제나의 지정석에 가 앉는다. 나는 주방에 주문이 제대로 들어갔는지를 확인한 후, 기유 씨를 위해 감자튀김을 새로 튀기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 보니. 테리타마 버거의 판매가 끝나기 전에, 그러니까 꽃이 완전히 지기 전에 기유 씨와 한 번 꽃구경을 가고 싶다. 오늘 집에 가면서 기유 씨에게 말해 봐야지.

 

 

 

 

오늘도 내가 일하는 매장에는 사신 씨가 햄버거를 먹으러 온다.

 

내가 있는 한, 아마 내일도. 내일의 다음 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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