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생화 굿즈를 참고하여 써봤습니다.
카마도 탄지로 탄생화 : 패랭이꽃 [ 순수한 사랑(순애) ]
토미오카 기유 탄생화 : 작약 [ 반드시 찾아올 행복, 수줍음 ]
으레 몇 번이고 되돌아오는 겨울은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허이연 색을 품은 채 낙화하는 눈송이들의 향연은 그야말로 절경 중의 절경이라고 해야 할 법 하나, 기유는 그걸 즐길 여유조차 제게 사치라며 고깝게 여겼다. 그저 겨울이란 건, 미쳐버린 시간이 또다시 저를 두고 나아가고 있다는 무심함에 가까웠다. 뽀드득. 얇게 쌓인 눈발에 이어지는 새하얀 발자국들 위로 새까만 물그림자가 서성이며 겹쳐왔다. 그리고 그 하얀 행렬의 끝은, 새벽빛에 잠긴 나비저택의 낡은 뒷문이었다. 텁텁한 목 언저리의 단추를 푸르자, 서성거리던 냉기가 온 몸을 감싸왔다.
저 홀로 한밤중의 방문이, 고요한 정적에 휘감긴 저택을 깨우지 않음에 감사했다. 행여 내리는 눈꽃에 아른거리는 달빛에, 어리숙한 제 행보가 노출되지 않을까한 염려가 앞섰다. 소리를 죽이다시피 한 걸음을 옮겨, 희미한 등빛이 밝히는 복도를 지났다. 때마침 당직을 서던 아오이는 이 은밀한 여정을 눈치 챘으나, 스쳐가는 붉은 하오리 자락에 눈을 감는 것을 택했다. 그리곤 무엇 하나 목격하지 않았다는 듯, 그저 묵묵히 간호사로서의 제 본분만을 충실히 다할 뿐이었다. 어련히 알아서 나오시겠지만, 그래도 다른 이들의 눈길에 들키는 변고가 일어나질 않기를 바랬다. 그저 오늘도, 무탈한 밤을 재촉할 뿐.
칠흑 같은 어둠에 파묻힌 겨울밤은 꽤나 운치 있었다. 입고 있던 환자복이 오물에 더러워진 탓에, 탄지로는 제법 오랜만에 맵시 있는 유카타를 입을 수 있었다. 아니, 오랜만이라는 말은 물러야겠다. 항상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서 늘 양보하는 삶만 걸어왔으니, 제 수중에 남는 것 낡고 빛바랜 옷들이 전부였다. 오히려 시노부씨의 자상한 배려로, 처음으로 제 몸에 딱 맞는 어엿한 새 옷들을 걸칠 수 있었다. 나중에 감사 인사는 꼭 드려야지. 고급스러운 하엽색으로 물들여진 소맷자락이 부드러이 잘게 흔들렸다.
소복한 눈이 쌓여가니, 아오이에게 두꺼운 겉옷을 걸쳐야 한다는 조건 하에 누릴 수 있는 사치려나? 널따란 뜰 앞에 펼쳐진 새하얀 눈의 도화지를 눈에 담다 보면, 순수했던 유년시절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동생들과 신나게 겨울을 만끽했던 기억들은, 결단코 돌아갈 수 없는 아픔으로 변모되기 마련이었다. 헤아릴 수 없는 그리움에 응어리진 슬픔은, 그렇게 오랫동안 곪았지. 이럴 땐 저만의 안식처가 필요한데…….
"날이 춥다.“
"…에?“
"병실 안에 있을 줄 알았는데."
모처럼 신이 저를 위한 변덕을 부려주신 걸까? 순간적으로 넋 나간 목소리로, 탄지로는 속내로만 애타던 안식처를 나직이 읊조렸다.
"기유씨...? 여긴 어떻게…….??"
"그저, 전해주러 왔다."
"네에....?"
"…….말린 작약과 그 뿌리다."
여기에 대추와 생강과 함께 우려내어 달이면, 보온이 된다고 한다. 감기에 걸렸다기에. 염려어린 뒷말에, 탄지로는 저도 모르게 짙은 잔웃음 한 떨기를 피워냈다. 느릿하게 건네지는 손길로부터 받은 보따리에서, 수줍은 향들이 새어나왔다. 깔끔한 상쾌함과 더불어 어딘가 시원하면서도 포근한, 그런 향. 어라? 그러고 보니, 작약 꽃이라면...?
"기유씨, 혹시 수주 저택에 피었던 꽃들을 쓰신 건가요?"
"....그래."
담담한 대답에, 탄지로는 한 번 더 제 세상이 무너지는 듯 했다. 어느 날, 당신이 태어난 어느 무용한 날을 기념하여, 연모하는 마음으로 손수 흙을 파내고 꽃을 심었었다. 오로지 절 이끄는 청명한 물길 앞에, 아름드리 작약 꽃들이 피워내길 바랬는데. 결국 약했던 자신으로 인하여, 당신을 위했던 꽃들은 돌고 돌아 저를 위한 꽃으로 되돌아올 줄이야. 살짝, 비스듬히 퍽 상해진 속내에, 절로 감췄던 말이 툭 튀어나온다.
"끝까지 기유씨에게 지킴 받네요, 저."
이 작약 꽃은, 기유씨의 꽃이잖아요. 이 꽃으로부터 약해진 몸을 지탱하는 것 자체가, 기유씨에게 수호 받는 것과 다름이 없죠. 한 치의 거짓이 섞이지 않은, 저 말간 웃음. 기유는 애써 그 웃음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시선을 잠시 애먼 곳에 돌렸다.
결코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고, 일순간의 치기어린 감정에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고, 수도 없이 스스로에게 세뇌했던 과정들이 절 말렸다. 까맣게 고인 기억들조차 비워내야 했던 상처투성이 그릇에, 무얼 또 염치없이 담겠냐고, 과거가 그리 일렀다. 그래, 나는 감히 네가 비춰주길 바라지 않아야 했다. 몰래 작게 주먹을 쥔 손이 염치없이 떨려온다.
....바보같이.